한자리서 만난 김주영·이문열…40년 인연 이어온 '문단거목'

문학 탐방 프로그램서 예비 문인들에 강연…술잔 기울이며 회포
이문열 "악당·보안관 뒤섞인 시대…폭력은 언제든 적용되는 주제"
김주영 "'객주' 이 악물고 써…상식에 매몰되면 창의력 잃어"
"문단에 나와 뵈었는데 제 큰형님 친구였어요. 그때 이후 잡혀서, 꼼짝도 못 하고. 크허허…."(이문열)
"이문열이가 출세했기 때문에 내하고 술 먹지, 원래 돌아가신 이 사람 형이 친구예요.

그래서 (지금은) 이 사람하고 술 먹는 거지."(김주영)
문단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투샷'이 성사됐다.

'객주'의 김주영(83)과 '사람의 아들'의 이문열(74) 작가가 지난 20일 경북 영양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다. 막걸리 잔을 든 김주영이 이문열에게 "어이~"라고 하자 9살 아래 이문열이 바로 소주잔을 들이켰다.

이 자리에는 '너에게 묻는다'. '연탄 한장' 등의 시로 유명한 안도현 시인도 함께 했다.

청송이 고향인 김주영과 영양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문열은 경북을 대표하는 문단의 거목(巨木)이다. 백발이 성성한 두 작가는 40여년 인연으로, 경상도 특유의 투박한 화법에도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있었다.

시종일관 유머를 섞은 김주영이 "이문열이가 말은 잘 못 하는데 글은 정확하게 쓴다"며 '껄껄' 웃자 이문열은 묵묵히 듣다가 같이 웃음지었다.

"이문열이 원래 이름이 '이열'이에요.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고생을 많이 했어요.

"(김주영)
김주영은 "3개 신문에 연재하고 있을 때인데, 매일신문에서 연재 요청이 왔다.

바빠서 거절했는데, 알고 보니 당시 매일신문 기자이던 이문열이가 전화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얘긴 나한테 안 한다"고 옛이야기를 꺼내놓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지난 20~21일 단국대 문예창작학과(학과장 안도현)와 음식시학(이종주 대표)이 경북문화재단(이희범 대표)과 함께 개최한 문학 탐방 프로그램 '창작의 길'에 강연자로 나섰다.

영양 두들마을과 청송 객주문학관에서 두 작가를 만나 창작의 기억과 글쓰기 근황을 들어봤다.

이들은 작품 세계는 다르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열의를 쏟은 게 글쓰기였다는 점과 고령인 탓에 새로운 집필에 회의적인 모습이 닮아있었다.
◇ 이문열 "잘 쓴 소설 '필론의 돼지'…새 집필 어렵지 않을까"
이문열은 45년간 소설가로 획을 그은 시간을 돌아보며 "글쓰기를 한 덕에 최악의 삶은 면한 것 같다"고 했다.

"제 작품 중엔 특별한 해설이 필요한 관념적인 글도, 그때 감성에 충실하게 쓴 글도, 수필처럼 감성과 논리가 적절하게 배분된 글도 있어요.

이렇게 구분해볼 때 자연스러운 감정을 드러내는 게 더 좋은 글인 것 같아요.

"
그는 스무 살 때까지 작가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사(文士)가 되는 걸 경계하는 환경에서도, 기질이 보였는지 '너 그랬다가 작가 된다'는 경고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국어 선생이 되려고 서울대 국어교육학과에 입학한 그는 한 문예 서클에서 기차역을 소재로 수필을 썼다.

3년에 한 번꼴로 이사하며 제집처럼 드나든 기차역에 대한 경험을 녹인 글이었다.

당시 그의 산문을 20분간 경청하던 학생들은 뒤늦게 큰 손뼉을 쳤다.

"만해 한용운의 시구('님의 침묵' 중)처럼 문학적 명성의 '날카로운 첫 키스'를 받은 기분이었죠. '글을 잘 써서 인정받으면 이런 도취에 빠지게 되겠구나'란 걸 처음 느꼈어요.

"
그 이후 글쓰기 습관과 글쓰기를 지향하는 사람이란 자각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형편이 안돼 학교를 그만둔 그는 학생도, 선생도 아닌 위치에서 등단도 하지 못한 채 9년을 보냈다.

"아홉 해를 낭인으로 살면서 심심할 때면 '한번 해볼까'란 기분으로 글을 썼어요.

창작의 길을 어떻게 재미있게 걸어왔는지 설명할 길은 없지만 어느 날 작가가 돼 있었죠."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사람의 아들'을 시작으로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구로 아리랑',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변경'을 비롯해 1980~1990년대 수많은 화제작과 베스트셀러를 낳았다.

그는 "돌아보면 장편 중에선 어딘가 빈 곳이나 억지가 보인다"며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중단편 중 '이건 제대로 썼네' 싶은 건 '필론의 돼지'(개정판은 '필론과 돼지')"라고 꼽았다.

'필론의 돼지'는 군인들이 탄 열차 안에서 벌어진 극심한 혼란과 폭력의 악순환을 다뤘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광주 얘기처럼 돼 버려 양쪽에서 욕을 먹었다"며 "폭력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든 적용된다.

실제 경험에서 나온 소설이며 중단편 중 가장 잘 썼다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글쓰기에 대해선 명쾌하게 확답하지 않았다.

월간지 신동아에 연재하다가 중단한 '둔주곡(遁走曲) 80년대'의 완결 계획을 묻자 이념과 선악이 모호해진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꺼내놓았다.

이 작품은 산업화와 민주화 등 심각한 불협화음의 시대였던 1980년대를 정의하는 소설로 그는 선악 구분의 모호성, 이념적 잣대 등에 대한 비판의식을 풀어놓을 계획이었다.

"원대한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꿈 자체가 어려워졌고, 세상을 섣불리 말할 수 없는 느낌이 들어요.

인터넷 문화 등이 끼어들며 좌·우 이런 것들이 낯선 세계가 됐죠. 악당과 보안관이 구분돼야 하는데 뒤섞인 시대이고요.

지배체제든 사상이든 그런 게 하나로 형성될 느낌은 받는데 저는 그걸 할 능력이 안 돼요.

"
그는 새로운 작품 계획도 "내 나이도 그렇고 집필이 어렵지 않을까 싶다"며 "집필에 야심을 갖고 기대를 높이려는 건 없다.

꼭 쓰고 싶은 게 있으면 조금씩 쓰겠지만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여는 건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날 그가 강연 차 찾은 곳은 실질적인 고향이자 재령(載寧) 이씨 집성촌이 있는 두들마을이다.

그의 집필실 등이 있던 광산문학연구소는 지난 6월 화재로 전소됐다.

올해 영양군은 광산문학연구소 등 여러 시설을 아울러 이문열문학관(가칭)을 개관할 예정이었다.

그는 "화재 원인은 찾지 못했다"며 "불이 난 곳에 다시 뭔가를 짓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주위에서 그 건물을 다시 복원하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 김주영 "철저한 현장답사·경험 녹여…'그만 써야겠다' 싶기도"
김주영은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에 빗대 '길 위의 작가'로 불린다.

책상머리에 가만히 앉아 글을 쓰지 않는다.

'쇠둘레를 찾아서'(1987)란 단편을 쓸 때도 배경인 철원을 세 번 답사했다.

청송에 있는 객주문학관 화제의 전시물 중 돋보기로 보지 않으면 해석 불가능한 깨알 글씨의 노트는 길 위에서 쓰였다.

그는 여전히 주머니에 수첩을 지니고 다닌다.

김주영은 "'객주'를 쓸 때 전국 장터를 순례하며 여인숙에 들어가 글을 써 신문사 지국으로 보냈다"며 "큰 노트에 깨알같이 글을 쓴 건, 짐을 줄이려는 심산이었다.

정말 이를 악물고 썼다.

소설 쓰는 사람은 체력이 있어야 한다.

다른 직업이 없었으니 여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기억했다.
'객주'는 1979년부터 1984년까지 4년 9개월 동안 서울신문에 연재한 기념비적 대하소설이다.

한 회에 원고지 7매씩을 써 보냈다고 한다.

1981년 9권이 책으로 출간된 데 이어 2013년 10권을 펴냈다.

40대 초반에 쓴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조선팔도를 누빈 보부상의 삶과 애환을 맛깔스러운 우리말로 펼쳐놓았다.

보부상 천봉삼을 중심인물로 전국 장터를 도는 보부상의 유랑을 파란만장하게 그렸다.

민초의 삶과 생명력뿐 아니라 조선 후기 상업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도 생생하게 녹아있다.

그는 보부상에 주목한 데 대해 "장터 가에 우리 집이 있었다"며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아니 에르노)가 경험한 것만 쓴다는데 내가 그렇다 보니 공감이 됐다.

장터 가에서 자라 장터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 객주문학마을에 있는 그의 생가는 담 하나를 두고 시장과 마주하고 있었다.

중편으로 구상한 작품이 대하소설로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은 고(故) 박원선 연세대 교수의 보부상을 다룬 논문 '객주'였다.

"보부상의 방대한 조직을 그 논문을 통해 알게 됐죠. 연재를 시작하자 교수님이 두 번이나 불러 밥을 사주시더군요.

"
그는 소설이 당초 구상보다 길어진 또 다른 이유로 원고료를 꼽기도 했다.

"얘기를 안 했는데도 세 차례 원고료를 올려줘 나중엔 한 달에 900만원이나 받았어요.

그때 담배를 피워가며 쓰느라 폐암에 걸릴 뻔했죠. 그만두겠다고 하니 신문사가 깜짝 놀랐어요.

너무 지쳤다고 말한 기억이 나요.

"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71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김주영은 '객주'를 비롯해 '활빈도', '천둥소리', '홍어', '화척' 등 선 굵은 대표작을 냈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으며 문단의 원로가 됐다.

고령에도 지난해 신작 장편 '광덕산 딱새 죽이기'를 낸 그는 향후 집필 계획을 묻자 반신반의한 답변을 내놓았다.

"앞으로 소설을 안 쓸까 싶기도 해요.

제가 아는 맞춤법과 지금 젊은 사람들 맞춤법도 완전히 다르고요.

젊은 사람들 소설 이해가 안 될 때면 '그만 써야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죠."
그는 지난 21일 객주문학관에서 예비 문인들과 만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어쩌다 보니" 글을 쓰게 됐다고 돌아봤다.

교과서를 구입하기도 어려웠다는 그는 소년지 '새벗' 등 접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땐 열등생이었어요.

거의 꼴찌를 했죠. 제 뒤에 늘 한 명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결석을 많이 했어요.

제가 어릴 때 고생하고 괄시받고, 외톨이였는데, 이렇게 오래 사는 건 큰 욕심이 없어 그런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 인생관을 묻곤 하는데, 어쩌다 이리 사는 것이지요.

껄껄."
그는 후배들에게는 "상식에 매몰되지 말라, 창의력을 잃어버린다"고 조언했다.

상식을 깬 몇 가지 유쾌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문학이나 예술도 마찬가지다. 상식을 벗어날 때 창의력이 꽃피기 시작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