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들여다봤던 촛불…휘청이는 '연대의 빛' 되다

김지영, 갤러리 P21서 개인전

"밝게 타오르다 꺼지는 촛불처럼
연대의 힘은 '죽음'에서 나와"
100호 규모의 캔버스 3개가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다. 언뜻 보면 같은 색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톤의 붉은색들이 어우러져 있다. 윗부분은 주황빛, 바깥으로 갈수록 검붉은 빛이 도드라진다. 촛불을 막 켰을 때 심지에 붉은 띠가 생기는 찰나를 담아낸 그림이다.

김지영 작가(35·사진)는 촛불의 일생을 그린다. 때로는 촛불이 막 ‘탄생’하는 순간을 그리고, 때로는 촛불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청이는 모습을 캔버스에 담는다. 김 작가의 개인전 ‘산란하는 숨결’이 열리고 있는 서울 이태원동 갤러리 P21은 이렇게 촛불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붉은 시간’ 연작 72점(드로잉 69점, 페인팅 3점)으로 가득 찼다.모두 똑같이 촛불을 보고 그린 그림이지만,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색상은 다 다르다. 온도에 따라 촛불이 띠는 색깔이 붉은색 푸른색 녹색 노란색 등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푸른색은 초가 활활 타오를 때 심지 가장 안쪽에서 보이는 색깔을 담은 것이고, 주황색과 노란색이 그러데이션을 이루며 어슴푸레 번지는 모습은 초의 가장 겉부분을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색깔을 담기 위해 김 작가는 매일 9시간 동안 작업실에 틀어박혀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본다고 했다. 초에 불을 붙인 후 심지가 모두 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촛불 사진을 찍는 대신 직접 초를 태우는 건 다채로운 빛깔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다. 김 작가는 “붉은 시간 연작도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로 볼 때 더 다채로운 색감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여러 색상이 서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대상의 윤곽선도 의도적으로 없앴다. 형상도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붉은 시간 연작은 촛불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스름한 노을빛 일몰이나 지평선 바다 등 다양한 풍경을 연상케 한다.
촛불을 통해 김 작가가 전달하고 싶었던 건 ‘사회적 재난 앞에서의 연대’다. “거대한 재난이 일어나면 정치적인 이슈로 변질되기도 하고, 너무 큰 슬픔 앞에서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나잖아요. 연대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어요. 사람들이 밝게 타오르다가 꺼지는 촛불을 바라보면서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이 싹트기를 바라요.”

P21은 오는 12월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적 아트페어 ‘아트바젤 마이애미 비치’에 김 작가의 단독 부스를 열고 붉은 시간 연작을 선보일 계획이다. 전시는 다음달 19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