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詠○(영○), 李山海(이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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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詠○(영○)李山海(이산해)

一腹生三子(일복생삼자)
中者兩面平(중자양면평)
秋來先後落(추래선후락)
難弟又難兄(난제우난형)

[주석]
· 詠(영) : ~을 읊다, ~을 노래하다.
· 李山海(이산해) : 조선 선조(宣祖) 대에 영의정을 두 차례나 지냈으며, 북인(北人)의 영수였다. 시서화(詩書畵)에 두루 능하였고, 저서에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다.
· 一腹(일복) 한 배. / 生三子(생삼자) : 세 아들을 낳다, 세 자식을 낳다.
· 中者(중자) : 가운데 녀석. ‘中者’가 ‘仲男(중남)’이나 ‘仲子(중자)’로 된 데도 있다. 둘 다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다. / 兩面平(양면평) : 양쪽 얼굴이 평평하다, 양쪽 뺨이 넓적하다.
· 秋來(추래) : 가을이 오다, 가을이 되다. / 先後落(선후락) : 선후로 떨어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지다.
· 難弟(난제) : 동생이라 하기 어렵다. / 又(우) : 또. / 難兄(난형) : 형이라 하기 어렵다. ※ 이 구절은 성어 ‘난형난제(難兄難弟)’를 풀어서 쓰며 난형과 난제의 위치를 바꾼 것이다.[태헌의 번역]
○을/를 읊다

한 배로 세 자식을 낳았는데
가운데 녀석은 양쪽 뺨이 넓적하네
가을이 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지니
동생이라 하기도, 또 형이라 하기도 어렵네

[번역노트]
역자는 청소년 시기에 한시(漢詩)를 읽고 전율을 느낀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 이 시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고교 시절에 한문자습서던가 문학자습서에서 이 시를 처음으로 보고 시쳇말로 감전이 된 듯한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하다.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지은 작품이라는 설명을 읽는 순간에 느꼈던 일종의 열등감은 오래도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듯하다. 스무 살이 다 되어가던 그 시절에 혼자서 얼굴 붉히며 느꼈던 그 자괴감을 어찌 필설로 형언(形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역자는 그 자괴감과는 상관없이 이 시를 처음 보았던 그날 바로 외웠을 정도로 이 시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대학생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친구며 지인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 시의 내용을 수수께끼로 내고 답을 맞히게 한 횟수가 잘은 몰라도 수십 번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시가 물건을 읊은 시를 의미하는, 이른바 영물시(詠物詩)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대학원 시절 이후였다.

주지하다시피 당(唐)나라 시기에 굳어진 영물시의 양식은, 음영(吟詠)의 대상이 되는 물건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말은 물론, 그것과 간접적으로 관계되는 어휘조차 쓰지 않으면서 시를 짓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물시는 시의 본문이 문제가 되고 시의 제목이 답이 되는, 일종의 수수께끼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오늘 역자가 의도적으로 숨긴, 이 시가 읊고 있는 대상에 대하여 얘기해 보기로 하자. 원시든 역시든 이 시를 오늘 처음으로 마주하고서 무엇을 읊은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면, 감각이 매우 뛰어나고 생각이 매우 유연한 사람으로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를 처음으로 마주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마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시와 관련한 역자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정답을 맞히는 속도는 학습량이나 지능과는 별 관계가 없었던 듯하다. 감각이나 감성, 유연한 사고 등이 정답을 찾는 속도를 높여주고, 나이가 어릴수록 정답을 찾는 속도가 더 빠르더라는 것이 역자가 경험적으로 내린 최종 결론이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슬픈 이유는, 몸만 굳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점점 굳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자는 젊게 사는 방법의 하나로, 생각을 유연하게 가지기를 권하고 싶다. 역자 역시 제대로 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각설하고, 제4구만을 봐서는 정답을 찾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제4구는 읊는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읊는 대상에 대한 시인의 평가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제4구는 제쳐두고 제1구부터 제3구까지 요리조리 뜯어보다 보면 정답이 찾아질 것이다. 독자들 생각에는 어떤 구절이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지는가? 이 대목에서 역자가 팁을 하나 주자면, 4구로 구성된 영물시의 대부분은 제3구에 구체적인 힌트가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시의 제3구에서 “가을이 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지니”라고 하였으니 가을에 떨어지는 것만 집중해서 찾아보면 될 것이다. 이 시를 어느 강연장에서 소개했더니 어느 분이 큰 소리로 “우리 집 애들 성적!”이라고 해서 좌중이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급기야 “남편 월급”, “주식”이라고 하신 분들까지 나와 시쳇말로 난리도 아니었던 기억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가을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물으면 거의 예외 없이 가장 먼저 나오는 대답이 바로 “나뭇잎”이다. 나뭇잎이 대체로 가을에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뭇잎”으로 봐서는 제1구와 제2구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뭇잎”은 정답이 아닌 것이다. 가을이 오면 대개 나뭇잎보다 먼저 떨어지는 것이 있다. 바로 그 나무에 달려 있는 과실(果實)이다. 그렇다면 가을철에 떨어지는 하고 많은 과실 가운데 정답은 과연 무엇일까? 제1구에서 “한 배로 세 자식을 낳았다” 하고, 제2구에서 “가운데 녀석은 양쪽 뺨이 넓적하다”고 하였으니, 이 두 경우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과실로는 오직 밤[栗]이 있을 뿐이다.

밤송이 하나에 대개 밤이 세 톨 들어 있고, 그 중간에 있는 밤톨은 양쪽 면이 넓적하게 생겼으며, 나무에 달린 밤송이에서 그 세 톨 가운데 어느 밤톨이 먼저 떨어지는지는 알 수가 없다는 데서 착안하여 이 시를 지었을 시인은, 누가 뭐래도 천재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 천재성 앞에서 평범한 청소년이었던 역자가 느꼈던 자괴감이 어떠했을지는 독자 여러분들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 이지함(李之菡) 선생의 조카인 이산해(李山海) 시인이 열 살도 되기 전에 이런 시를 지었다면, 후손들은 물론 제자들과 지인들까지 이 시를 다투어 전했을 법하건만,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산해 선생의 문집인 ≪아계유고≫에는 이 시가 보이지 않고, “한국고전종합DB”에서도 시 전체는 물론 시구 하나조차 검색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참으로 많은데 이 시 역시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역자가 오늘 소개한 이 시는 오언고시(五言古詩)지만, 제2구의 ‘中者’를 ‘中男’으로 볼 경우 오언절구(五言絶句)가 된다. 어느 경우든 그 압운자는 ‘平(평)’과 ‘兄(형)’이다.

2022. 10. 25.<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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