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실패작'이라 했지만…영원히 남은 비제의 예술 [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입력
수정
지면A29
플로리앙 젤레르 감독 '더 파더'영국 런던에 사는 80대 노인 앤서니의 삶은 평화롭다. 헤드셋을 쓴 채 오페라 음악을 듣는 게 일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주 찾아오던 딸 앤이 갑자기 런던을 떠난다고 말한다. 그러자 앤서니는 기억의 조각들이 흩어지고 뒤섞이는 걸 느낀다. ‘앤이 내 딸이 맞긴 한 걸까. 내 집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딸의 남편이 맞을까.’
영화 속 치매 환자 앤서니의
헤드셋서 흐르는 오페라 음악
비제 '진주 조개잡이'의 아리아
9살 파리음악원 최연소 입학
어릴적 음악 천재로 불린 비제
첫 작품 '테 데움' 혹평에 좌절
대표작 카르멘도 '실패작' 굴욕
37세로 사망한 뒤에야 사랑받아
"모방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
생활고에도 자기 음악세계 지켜
플로리앙 젤레르 감독의 영화 ‘더 파더’(2021)는 치매 환자 앤서니를 통해 기억의 상실과 이로 인한 고통을 그린다. 세계적인 명배우들이 출연해 화제가 됐다. 앤서니 홉킨스가 앤서니 역을, 올리비아 콜먼은 앤 역을 맡았다.앤서니가 즐겨듣는 오페라 음악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돕고,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해준다. 영화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오페라 아리아는 프랑스 출신 음악가 조르주 비제(1838~1875)의 작품이다. 오페라 ‘진주 조개잡이’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이다. 앤서니가 헤드셋으로 음악을 듣는 장면, 딸이 아버지를 두고 떠나는 장면 등에서 흐른다.
비제는 ‘진주 조개잡이’뿐만 아니라 오페라 ‘카르멘’ ‘아를의 여인 모음곡’ 등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다. 하지만 그는 ‘비운의 천재’로 불린다. 그래서인지 비제의 음악은 들으면 들을수록 슬프고 애잔하다.
비제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 천재’로 인정받았다.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천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파리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프랑스 정부 지원을 받아 4년간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갈 수 있는 ‘로마대상’의 우승 트로피도 거머쥐었다. 로마에서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까지 섭렵하게 된 비제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하지만 첫 자작곡인 종교 음악 ‘테 데움’은 혹평을 받았다. 실패를 몰랐던 만큼 좌절도 컸다.그가 25세 되던 해에 처음 무대에 오른 진주 조개잡이도 실패작이었다. 이 작품은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속 앤서니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깊은 절망을 다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진주 조개잡이는 나디르와 주르가라는 두 남자가 여사제 레일라를 동시에 사랑하는 스토리다. 이들은 우정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지만, 나디르는 결국 레일라와의 사랑을 버리지 못한다. 이를 알게 된 주르가는 두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가 포기한다. 여사제의 사랑이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의 사랑이 알려지자 곧 위험에 빠지게 된다. 주르가는 두 사람이 도망가도록 돕고, 대신 처형당한다. 내용도 흥미롭고 아리아도 아름답지만 흥행하지는 못했다.
비제의 대표작 카르멘도 처음에는 실패작 리스트에 올랐다. 계속된 실패에 위축됐던 비제는 이 작품만은 꼭 성공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매달렸다.
하지만 관객들은 집시여인이 주인공이라는 점에 실망했고, 비제는 크게 상심했다. 그렇게 카르멘은 비제의 유작이 됐다. 초연 실패 후 37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카르멘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건 그가 떠난 뒤였다.비제는 생계를 위협받는 순간에도 자신의 음악세계를 지키려 노력했다. 당시 많은 음악가가 바그너의 오페라를 따라 했지만, 비제는 자신의 길을 걸었다. “모방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모방의 대상이 되는 작품이 위대할수록 그 모방은 우스운 것이 된다.”
편하고 쉬운 길 대신 어렵지만 가야 할 길을 택한 비제. 세평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친 그의 삶은 현대인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