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학업·가정… 1인 3역 조폐공사 여성 안전관리자 소안순 차장의 40년 근속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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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에서 안전관리 업무를 맡은 소안순 차장의 40년 근속이 화제가 되고 있다.
소안순 차장은 최근 열린 창립기념식에서 40년 근속 표창을 받았는데, 사내 게시판에는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면서 직장 생활을 해온 소 차장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1982년에 입사한 소 차장은 품질검사 업무를 거쳐 지난 2006년부터 산업안전 관리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요즘이야 안전이 주목받지만, 당시는 한직 중의 한직으로 인식됐다.
안전관리자로 선임이 되면 좌천됐다고 위로받던 시기였다.당시 외부 기관에서 안전관리자의 법정 교육을 받았는데 여성은 혼자였다고 한다.
교육받던 다른 기관 남성들이 “그 험한 일을 어찌 여자가 한단 말인가, 현장 가면 직원들과 싸우기 일쑤고 관리자들은 도와주지도 않을 텐데…” 라는 위로를 들었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한다.
소 차장은 안전관리 업무가 전체 직원들과 소통할 수 있고 직원들이 자신을 보면 ‘마음부터 안전해진다’며 반겨 주기도 했다면서 자부심을 갖고 일했다고 한다.안전은 경영자와 근로자들이 안전의식을 함께 공유할 때 찾아오는 선물이라는 게 소 차장의 지론이다.
경영자의 안전에 대한 투자와 근로자의 안전 수칙 준수, 안전관리자의 올바른 지도·조언, 모두가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소 차장은 안전관리자로서 대구지역에 창궐했던 코로나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소 차장은 2019년 암 수술을 받은 뒤 2020년 초까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2020년 2월에 대구 지역에도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 경산 화폐본부도 비상이 걸렸다.
소 차장은 화폐본부 직원 650명을 코로나로부터 사수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직원 중에 확진자가 나오면 은행권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소 차장은 암 치료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안전 매뉴얼 개발, 방역 수칙 수립, 위기 대응 조직 구성, 안전 캠페인 등 눈코 뜰 새 없이 쏟아지는 업무를 소화했다.
직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동참으로 코로나19에 확진되는 직원이 2020년에는 한명도 발생하지 않은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소 차장은 “함께 고생한 동료 직원들의 협조 덕분”이라며 공을 돌렸다.
소 차장은 40년 직장생활을 한마디로 ‘길’로 표현했다.
때로는 흙으로 다져진 길을 걷기도 하고 또 때로는 모래와 자갈길을 걸어왔다고 말한다.
전북 전주여고를 졸업한 소 차장은 대학에 진학해 수학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고2 때 어머님이 별세하면서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조폐공사 취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입사 후 소 차장은 대학 진학의 꿈을 접지 못하고 1984년 대전 한남대학교 야간을 다니면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그는 퇴근하자마자 수업 시간에 맞추기 위해 택시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낮에는 우표 검사 및 포장 일을 하고 밤늦게까지 책과 씨름하며 졸업했다고 한다.
대전 조폐창이 1988년 옥천조폐창으로 이전하고 1999년에는 옥천조폐창이 폐쇄되고 경산 조폐창으로 통합돼
당시 많은 동료 직원들이 사표를 냈다.
소 차장 역시 퇴사 여부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소 차장은 사표 대신 일을 택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2015년에는 영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으며 사회복지사 1급을 취득하기도 했다.
소 차장은 조폐공사에는 드물게 한남대학교와 영남대학교 두 개 학위를 갖고 있다.
소 차장은 40년 동안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솔직함’에서 찾았다.
소 차장은 자기 능력 범위 안에서 집안일을 감당하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많은 가정사를 100%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선 너무 힘들기에 최선을 다하되 못다 한 부분은 미련을 두지 말자, 그리고 자신에게 솔직해지자고 여러 차례 마음먹었다고 했다.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거나 분담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지체 없이 이야기하면서 가족들과 대화도 늘렸다.
소 차장은 2012년 4월 ‘남녀 고용 평등 유공자’로 대구지방고용노동청장상을 받았다.
소 차장은 여성 후배들에게 “평등은 차이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서로의 장점을 인정해야 한다”며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배우자, 자녀, 또한 우리 직원 간에도 모두 적용된다”고 말했다.
소 차장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산업안전기사 2급과 1급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학원에 갈 시간은 없고 출퇴근 시간에 통근버스 안에서 공부했다고 했다.
그는 직장을 다니면서 가정을 잘 유지해 갈 수 있었던 것은 회사 복지제도가 타 회사보다 잘 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출퇴근 시간도 정확하고 휴일에도 항상 쉴 수 있으며 휴가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환경이기에 가족 행사나 아이들 학교행사에도 대체로 편안하게 참석할 수 있었다고 했다.소 차장은 후배들에게 “회사 생활에서 늘 변하지 않는 것은 책임감과 성실함”이라고 강조했다.
대전=임호범 기자 lhb@hankyung.com
소안순 차장은 최근 열린 창립기념식에서 40년 근속 표창을 받았는데, 사내 게시판에는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면서 직장 생활을 해온 소 차장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1982년에 입사한 소 차장은 품질검사 업무를 거쳐 지난 2006년부터 산업안전 관리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요즘이야 안전이 주목받지만, 당시는 한직 중의 한직으로 인식됐다.
안전관리자로 선임이 되면 좌천됐다고 위로받던 시기였다.당시 외부 기관에서 안전관리자의 법정 교육을 받았는데 여성은 혼자였다고 한다.
교육받던 다른 기관 남성들이 “그 험한 일을 어찌 여자가 한단 말인가, 현장 가면 직원들과 싸우기 일쑤고 관리자들은 도와주지도 않을 텐데…” 라는 위로를 들었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한다.
소 차장은 안전관리 업무가 전체 직원들과 소통할 수 있고 직원들이 자신을 보면 ‘마음부터 안전해진다’며 반겨 주기도 했다면서 자부심을 갖고 일했다고 한다.안전은 경영자와 근로자들이 안전의식을 함께 공유할 때 찾아오는 선물이라는 게 소 차장의 지론이다.
경영자의 안전에 대한 투자와 근로자의 안전 수칙 준수, 안전관리자의 올바른 지도·조언, 모두가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소 차장은 안전관리자로서 대구지역에 창궐했던 코로나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소 차장은 2019년 암 수술을 받은 뒤 2020년 초까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2020년 2월에 대구 지역에도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 경산 화폐본부도 비상이 걸렸다.
소 차장은 화폐본부 직원 650명을 코로나로부터 사수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직원 중에 확진자가 나오면 은행권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소 차장은 암 치료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안전 매뉴얼 개발, 방역 수칙 수립, 위기 대응 조직 구성, 안전 캠페인 등 눈코 뜰 새 없이 쏟아지는 업무를 소화했다.
직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동참으로 코로나19에 확진되는 직원이 2020년에는 한명도 발생하지 않은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소 차장은 “함께 고생한 동료 직원들의 협조 덕분”이라며 공을 돌렸다.
소 차장은 40년 직장생활을 한마디로 ‘길’로 표현했다.
때로는 흙으로 다져진 길을 걷기도 하고 또 때로는 모래와 자갈길을 걸어왔다고 말한다.
전북 전주여고를 졸업한 소 차장은 대학에 진학해 수학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고2 때 어머님이 별세하면서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조폐공사 취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입사 후 소 차장은 대학 진학의 꿈을 접지 못하고 1984년 대전 한남대학교 야간을 다니면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그는 퇴근하자마자 수업 시간에 맞추기 위해 택시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낮에는 우표 검사 및 포장 일을 하고 밤늦게까지 책과 씨름하며 졸업했다고 한다.
대전 조폐창이 1988년 옥천조폐창으로 이전하고 1999년에는 옥천조폐창이 폐쇄되고 경산 조폐창으로 통합돼
당시 많은 동료 직원들이 사표를 냈다.
소 차장 역시 퇴사 여부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소 차장은 사표 대신 일을 택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2015년에는 영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으며 사회복지사 1급을 취득하기도 했다.
소 차장은 조폐공사에는 드물게 한남대학교와 영남대학교 두 개 학위를 갖고 있다.
소 차장은 40년 동안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솔직함’에서 찾았다.
소 차장은 자기 능력 범위 안에서 집안일을 감당하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많은 가정사를 100%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선 너무 힘들기에 최선을 다하되 못다 한 부분은 미련을 두지 말자, 그리고 자신에게 솔직해지자고 여러 차례 마음먹었다고 했다.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거나 분담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지체 없이 이야기하면서 가족들과 대화도 늘렸다.
소 차장은 2012년 4월 ‘남녀 고용 평등 유공자’로 대구지방고용노동청장상을 받았다.
소 차장은 여성 후배들에게 “평등은 차이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서로의 장점을 인정해야 한다”며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배우자, 자녀, 또한 우리 직원 간에도 모두 적용된다”고 말했다.
소 차장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산업안전기사 2급과 1급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학원에 갈 시간은 없고 출퇴근 시간에 통근버스 안에서 공부했다고 했다.
그는 직장을 다니면서 가정을 잘 유지해 갈 수 있었던 것은 회사 복지제도가 타 회사보다 잘 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출퇴근 시간도 정확하고 휴일에도 항상 쉴 수 있으며 휴가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환경이기에 가족 행사나 아이들 학교행사에도 대체로 편안하게 참석할 수 있었다고 했다.소 차장은 후배들에게 “회사 생활에서 늘 변하지 않는 것은 책임감과 성실함”이라고 강조했다.
대전=임호범 기자 lh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