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 4m 내리막길 수백명 뒤엉켜…깔리고 밟힌 채 "살려달라" 절규

아수라장 된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좁고 가파른 골목
성인 5~6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

경사로 위쪽에 있던 사람들
아래로 내려가려고 "밀어 밀어"
깔린사람 위로 수백명이 쓰러져

신고 후 바로 구급차 출동했지만
인파 막혀 1시간 지나서야 도착
< 이태원의 비극 > 지난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압사 사고 현장(왼쪽 사진). 119구조대원과 경찰이 뒤엉킨 채 손을 내민 사람들을 끌어내고 있다. 다음 날인 30일 폴리스라인이 쳐진 사고 현장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꽃이 놓여 있다(오른쪽 사진). 뉴스1/김범준 기자
30일 0시10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4차선 도로 길가와 인도 곳곳에 사망자로 추정되는 피해자 수십 명이 뉘어져 있었다. 봉변을 당한 피해자의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압사 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김모씨(29)는 “함께 핼러윈을 즐기러 온 친구인데 수많은 인파 속에서 헤어진 뒤 1시간이 지나고서야 찾았다”며 “얼굴과 몸을 가려줄 모포도 없어 주변 상가에서 직접 사왔다”고 했다.

아직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의 가슴 부위에는 ‘N’이라는 단어가 크게 쓰여 있었다. 사고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심폐소생술(CPR)을 시도했지만 가망이 없었다는 표시다. 한 소방대원은 “해밀톤호텔 뒷골목에 수십 명이 심정지 상태에 빠져 있었다”며 “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는 시민들이 뛰쳐나와 1명이라도 살려보려고 노력했지만 1인당 4~5명은 맡아야 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아수라장 된 사고 현장

지난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압사 사고 현장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사고 현장에선 긴박하게 구조작업을 벌이는 한편, 주변 소음이 워낙 커 이 상황을 모르는 이들은 큰소리로 이야기하며 술을 마시는 모습도 연출됐다. 이태원역 인근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신모씨(32)는 “조커 복장을 한 남성이 신데렐라 옷을 입은 여성을 업고 가고 유명 캐릭터가 들것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엔 핼러윈 이벤트나 장난인 줄 알았다”며 “뒤늦게 심각한 상황을 파악하고 시민들을 도왔는데 돌이켜보면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태원역 인근 도로는 수십 대의 구급차와 경찰차가 뒤엉켰다. 4차로 도로 곳곳이 무단횡단을 하고 장난을 치는 시민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 관계자는 “도로 한복판에서 춤을 추면서 구급차를 막은 시민도 있었다”며 “이태원동 일대 차량 통행을 통제하고 인도에 펜스를 쳐 통제했다”고 말했다. 경찰과 소방 관계자들은 해밀톤호텔 뒷골목에 남아 있던 시민들을 내보냈다. 추가 피해자를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다수의 시민은 50m 떨어진 맞은편 골목으로 넘어가 다른 주점에서 핼러윈을 즐겼다. 인근 클럽에는 30일 새벽 4시까지 입장을 기다리는 긴 대기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와중에도 웃고 떠들며 장난을 치는 시민들도 있었다. 유명 캐릭터 옷을 입은 한 무리가 사망자로 추정되는 사람 옆에 누워 있다가 그 모습을 본 다른 시민들과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일부러 밀었다”…생존자들 한목소리

생존자들은 당시 사고 현장에 대규모 인파가 밀집하면서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통제 불능 상태였다고 전했다. 몽골인 덕익 씨(38)는 “사람들이 넘어지기 10여 분 전부터 발에 땅이 닿지 않은 채 공중에 떠 있었다”며 “넘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앞사람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버텼다”고 말했다. 직장인 황모씨(34)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빠져나오면서 사람으로 추정되는 물체를 밟은 것 같은데 발밑을 내려다보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복수의 생존자들은 “누군가 밀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김모씨(21)는 “골목 뒤편에 있던 남성들이 ‘밀어!’라고 크게 외치면서 밀기 시작했다”며 “맨 앞줄에 여성들이 넘어지면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좁은 골목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뒤엉켜 상가 1층 높이까지 포개졌다”고 했다.

권용훈/이광식/이지은 기자 f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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