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순 칼럼] 다시 생각하는 '하이테크 시대의 로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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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드러난 IT 강국 첨단 사회의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은 5233만자에 오탈자 하나 없다. 무결점의 국보다. 고도로 정제된 경판의 극적인 균일성이 그 시대에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대 최고 장인·지식인들의 신심도 컸겠지만 1자 1배, 3배의 수행적 제작 방식 영향이 컸을 것이다. 최고 전문가도 한 자 새기고 절 한 번, 때로는 세 번으로 호흡을 고르며 나아갔다. 의욕이 넘치고 마음이 급해도 천천히 올라야 하는 것은 킬리만자로 등산법도 닮았다. 정상이 뻔히 보이고 체력이 넘쳐도 며칠에 걸쳐 고도별 기압에 맞춰가는 게 5895m 최고봉 등정의 안전수칙이다. 눈으로는 못 보는 고산병 방지법이다.
예상도 못한 취약성
경시된 '기본기' 다져야 진짜 발전
충격 크지만 '국민통제 정부'는 곤란
실현 불가능한 '전지전능 국가' 요구
'전방위 통제 권력' 키울까 우려
허원순 논설위원
하이테크(high tech) 시대에 ‘기본’을 다시 생각해본다. 하이테크가 현란하게 펼쳐질수록 ‘하이 콘셉트(high concept)’ 기반의 기본기, ‘로테크(low tech)’도 중요해진다. 필자가 ‘하이테크 시대의 로테크’라는 칼럼을 쓴 게 10년도 더 됐다. 9·11 테러 등을 돌아본 나름의 성찰이었다. 세계 최고 하이테크 도시의 최첨단 상징물을 단박에 무너뜨리며 미국을 슬픔과 공포, 분노로 몰아넣은 게 단검 한 자루를 쥔 테러범의 로테크였다. 구식 수법에 무너진 신기술 첨단 사회의 취약한 단면을 그런 구도로 비춰봤다. 공감과 동의가 좀 있어서 같은 제목으로 책도 냈고, 성원이 있어 여러 쇄 펴내기도 했다.이태원 참사가 이 화두를 다시 일깨워준다. 하이테크로 내달려온 정보기술(IT) 강국의 치명적 취약점 하나가 세계 톱10의 거대 도시 서울에서 드러난 것은 무서운 대가의 경고다. 사고 이후 넘쳐나는 숱한 지적질에 ‘또 공자님 말씀’ 하나 덧보탤까봐 조심된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보다 근본 문제를 알고 진짜 교훈을 얻어야 비슷한 사고를 최대한 막는다. 이게 사회의 진보다. 무엇보다 기본기 다지기, 제자리 잘 지키기, 스스로를 살피는 자립적 삶에 대한 현대인 각자의 책임감이 중요하다. 이런 게 하이테크 시대에 더 중요해진 로테크다.
안 그래도 한국에 대해 ‘뭔가 붕붕 떠다니는 사회’라는 비판이 없지 않았다. 곳곳에서 웃자람의 부작용이 쌓여왔지만 무시됐다. 하지만 ‘안전도 결국은 비용 문제’라는 정도의 원리조차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편리, 재미, 감각적 쾌(快)를 좀체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국가적 발전 아젠다든, 특정 정권의 정책이든, 일반적 사회 관심사든, 차분한 공론은 없고 과도한 쏠림만 두드러지는 게 기질처럼 된 ‘신(新)한국인론’으로 치환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게 하이테크 시대의 단맛은 누리면서도 그 이면과 바닥은 못 보는 것 아니냐는 자성이지만, 괜한 걱정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퍼졌다. 보편화된 레버리지 투자, 견제 없는 일방의 질주도 경제·산업에서 하이테크 물결의 한 줄기였다. 근검과 절약, 절제와 균형, 건강과 안전 같은 로테크 가치가 경시되면서 금융과 자산시장, 재정과 노동 부문에선 이미 대가를 치르기 시작했다. 유례없는 지금의 복합 위기야말로 총체적 결과 아닌가.5060세대 한국인 중 다수가 석기·청동기 시대의 원시적 삶부터 4차 산업혁명기 생활까지를 당대에 겪고 있다. 이들의 아들딸에게 하이테크 기반 편의 기기와 문화·오락은 일상 그 자체다. 압축 성장, 곧 하이테크 세상으로의 과속 이행은 모든 세대에 달콤했다. 편리는 빠른 속도에 비례했다. 이제 와서 이 메가트렌드를 되돌릴 길도 없다. 새 인류 청년세대엔 더 그럴 것이다. 결국 하이테크 사회의 실상과 이면이라도 제대로 인식하자는 것일 뿐, 전 시대의 로테크로 전면 복귀하자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진정 경계할 것은 또 다른 쏠림이다. 막연한 분노나 끝없는 슬픔도 그런 차원에서 경계 대상이다. 상식·합리 이상의 책임 추궁도 분노 풀이 희생양 찾기의 연장이라면 지양돼야 한다.
일각의 ‘국민통제 정부’ 요구가 걱정되는 것도 그래서다. 재발방지책은 중요하지만, 통제 국가로 가면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집단적 파토스가 극대화된 대중의 정서를 최대한 여과해 수렴하고, 새 기준을 만들더라도 최소한으로 하는 게 정부와 국회가 할 일이다. ‘정부 무한책임론’은 공직자의 자세로도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 ‘법과 규정대로 정확하고, 충실하게’가 답이다. ‘전지전능 정부’는 ‘전방위로 통제하는 독재’가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또 하나의 쏠림, 또 다른 차원의 과잉을 막자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