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에 담긴 진짜 vs 가짜 바로크 음악[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도로테아 뢰슈만이 부른 오페라 '로델린다'의 아리아 '용서받지 못할 자여, 나는 맹세했노라'. /뮤지컬펀치라인 유튜브 채널

미국 아카데미에서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포함해 4관왕을 휩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 이 작품에 어떤 음악들이 나왔는지 기억하시나요. '기생충'은 강렬한 스토리, 참혹한 핏빛 결말 등이 인상적인 영화죠. 그런데 음악은 정반대 분위기입니다. 우아하고 화려한 느낌의 바로크 음악이 주로 나옵니다. 상반된 음악을 통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부각시킨 겁니다.

그런데 영화 속 바로크 음악엔 진짜 바로크 음악과 가짜 바로크 음악이 섞여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한걸까요? 여기엔 다양한 연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
가짜 바로크 음악은 영화 초반부에 주로 나옵니다. 기택(송강호 분)네 가족들이 박 사장(이선균 분)의 집에 차례차례 입성하면서 흐르는데요. 그중 가장 인상적인 가짜 바로크 음악은 연교(조여정 분)가 '믿음의 벨트'를 언급한 직후에 나옵니다. 기정(박소담 분)은 연교에게 운전기사를 소개해 주겠다며 기택을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정말 만나보시겠어요?"라고 묻습니다. 연교는 이렇게 답하죠. "믿는 사람 소개로 연결, 연결. 이게 베스트인 것 같아. 일종의 뭐랄까, 믿음의 벨트?"

이 순간부터 정재일 음악감독이 만든 가짜 바로크 음악 '믿음의 벨트'가 나옵니다. 운전기사로 일하게 된 기택이 신나게 수입 차 매장을 가 차 구조를 파악하고, 박 사장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계속 흐르죠. 진짜일거라고 굳건하게 알았던 믿음의 벨트가 실은 가짜임을 암시하는 겁니다.
헨델
그렇다면 진짜 바로크 음악은 언제 나올까요. 독일 출신 음악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의 오페라 '로델린다'의 아리아가 두 번에 걸쳐 흐릅니다. 기택의 가족 전원이 모두 박 사장의 집에 입성하게 된 장면에 먼저 나오죠. 충숙(장혜진 분)이 문광(이정은 분)을 밀어내고 가사도우미가 된 순간입니다. 이때 나오는 곡은 '용서받지 못할 자여, 나는 맹세했노라'라는 아리아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에서 두 번째 아리아가 흘러나옵니다. 정원에서 생일 파티가 벌어지던 날, 지하에 살던 근세(박명훈 분)이 지상으로 나오는 장면입니다. 파티에 초대된 한 성악가가 '나의 사랑하는 이여'라는 아리아를 부르고 있는 가운데, 잔혹한 칼부림이 시작됩니다.
영화 '기생충'.
두 장면에 왜 진짜 바로크 음악인 헨델의 아리아가 사용된 걸까요. '로델린다'의 이야기를 하기 전, 헨델의 삶을 먼저 살펴볼까요. 헨델은 바흐와 함께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입니다. 그가 만든 '울게 하소서' '사라방드' '할렐루야 합창곡' 등은 오늘날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죠. 이 때문에 온화하고 따뜻한 이미지만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헨델은 강인한 의지와 끈질긴 생명력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독일에서 나고 자랐지만, 영국에서 자신의 작품이 알려지자 과감히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페라 '리날도'를 포함해 총 44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썼습니다. 뛰어난 음악 실력뿐 아니라 탁월한 사업 수완으로 영국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영국 왕실의 지원까지 받아냈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낯선 세계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파고드는 모습은 기택네 가족과도 약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헨델페스티벌오케스트라가 연주한 헨델의 '사라방드'. /뮤직아트스트링스 유튜브 채널

그런 헨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전문으로 공연을 올리는 로열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1718년부터 영국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어 음악극이 유행했죠. 그러자 로열음악아카데미는 물론이고 헨델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힘든 순간이 지속됐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꾸준히 만들고 올렸죠. 그러다 1724년 초연한 '줄리오 체사레'가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자신감을 회복한 헨델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총역량을 집결해 '로델린다'를 만듭니다. 이 작품은 1725년 그가 마흔 살이 되던 해 초연됐으며,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로델린다'는 이탈리아 한 왕국의 왕비인 로델린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로델린다는 남편의 왕위를 빼앗은 그리모알도 세력에 맞서 싸웁니다. 그리모알도는 로델린다에게 오히려 연정을 품고 청혼하는데요. 로델린다는 죽은 남편과의 신뢰를 지키고 아들에게 남은 사랑을 바치겠다고 답하죠. 이를 노래하는 곡이 '용서받지 못할 자여, 나는 맹세했노라'입니다.
영화 '기생충'.
충숙의 입성 장면에 영화에서 진짜 바로크 음악이 사용된 이유는 '희망'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충숙까지 기택의 가족들이 전부 박 사장의 집에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가짜가 아닌 진짜가 되는, 일종의 신분 상승을 꿈꿨다고 볼 수 있죠.

잔혹한 결말을 낳는 파티 장면에 나온 '나의 사랑하는 이여'란 곡은 화해와 용서의 의미를 담은 곡입니다. "슬픔과 고통은 모두 사라졌어요"라고 노래하죠. 영화 장면과 전혀 상반된 의미와 분위기의 아리아인데요. 의도적으로 다른 의미의 장면과 음악을 배치하고 충돌시켜, 비극을 더욱 극대화했습니다.

르네 플레밍이 부른 오페라 '로델린다'의 아리아 '나의 사랑하는 이여'./메트로폴리탄오페라 유튜브 채널 영화 속 진짜 바로크 음악과 가짜 바로크 음악에 이토록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니, '다 계획이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관객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할 부분까지 정교하고 세심하게 표현했기에, 오스카의 영광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명작의 의미를 헨델의 투철한 의지, 봉 감독의 섬세한 연출을 통해 되새기게 됩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