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찾아간 독일 총리…"시작에 불과" 위기감 고조 [글로벌 핫이슈]

러시아 때문에 울고 미국에 뺨맞은 독일
선택지는 중국?
"(독일의 세계 최대 화학기업) BASF는 앞으로 유럽에서는 생산 활동을 완전 축소할 겁니다. 당국이 각종 산업 규제를 강화하고 최근엔 (러시아 전쟁발) 에너지 대란까지 겹친 유럽이 과연 사업하기 좋은 환경일지… 약점을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BASF 최고경영자(CEO) 마틴 브루더뮐러. (2022년 10월 26일 실적 발표 컨퍼런스에서)

"유럽연합(EU)도 역내 자동차 제조사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배터리의 중국 의존도를 줄이세요."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2022년 11월 1일 EU 무역장관들과 회담 자리에서)한국경제신문의 글로벌 핫이슈, 이번엔 어느 지역이나 국가에 국한되지 않은 그야말로 글로벌한 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유럽과 미국, 중국을 모두 아우르는 '지정학적 분석'이 필요한 내용인데요, 이 뉴스가 EU와 독일에서 연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독일의 중국행…"유럽은 사업하기 힘든 곳 됐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4일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기 위해서라구요. 숄츠 총리의 방중은 코로나19 여파 이후 주요 7국(G7) 정상들 가운데 처음입니다. 그의 경제사절단에는 BASF를 비롯해 폭스바겐, 지멘스 등 독일 대표 기업 경영자 12명이 함께 했습니다.

미국·유럽뿐만 아니라 독일 내부에서도 비판여론이 거셉니다. 중국의 기술 독주를 견제하고 각종 원자재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서방의 공동 노력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죠. 최근 3연임에 성공한 시 주석의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모양새로 비칠 수도 있구요.
마틴 브루더뮐러 BASF 최고경영자. BASF제공
독일의 중국향(向)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칼럼에서 "브루더뮐러 CEO의 지적은 옳다"고 했습니다. 유럽은 더 이상 기업들이 사업하기에 좋은 환경을 가진 지역이 아니란 주장이죠. 가장 시급하면서도 표면적인 원인은 '러시아 탓'입니다. 올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뒤 유럽에서 에너지 위기가 촉발됐습니다. 화학 철강 등 에너지 집약적인 산업군의 경우 치솟은 에너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장기간 조업을 중단한 곳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브루더뮐러 CEO의 발언을 좀더 깊게 들여다보면 EU 당국의 '깐깐한 산업 규제'가 근본적인 원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FT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EU 당국이 쏟아낸 거미줄 같은 환경 규제, 미완성인 유럽 단일 시장 프로젝트 등으로 인해 기업들의 중복 비용이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독일의 대표 기업인 BASF의 '뼈 때리는' 일침이 EU 정치인들에겐 폭탄 선언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기업들의 탈(脫)유럽 행렬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단 위기감이죠.

결국 BASF는 중국에 100억달러(약 14조원) 규모의 최첨단 화학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중국인걸까요? 과연 중국만이 대안일까요? 이 대목에서 캐서린 타이 미국 USTR 대표의 최근 발언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1일 체코에서 열린 EU 무역장관들과 회담에서 그는 유럽 당국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도 핫이슈로 떠오른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때문입니다.

전 세계 투자금 빨아들이는 美·中


IRA는 북미산 배터리를 쓰거나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자동차에만 보조금을 주고, 미국 신재생에너지 생산시설에 세액공제를 해주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명분은 탄소배출을 줄이고 물가상승률을 낮추기 위해서라고 내세웠지만, 내심은 중국에 타격을 주는 동시에 미국의 공급망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죠.

IRA뿐만 아니라 반도체산업육성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겠다는 '마이웨이'죠. 미국이 전 세계 기업들의 설비 투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 과정에서 EU와 한국, 일본 등 동맹국들이 겪을 심각한 기술, 자본 유출은 '부수적 피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걸까요. (다만 자동차나 신재생에너지 산업군이 훨씬 큰 유럽의 경우 반도체법에 대한 관심은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덜한 것 같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의 에너지 대란과 IRA 통과가 맞물려 미국은 유럽 다국적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보도합니다. FT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에 건넨 선물"이라고까지 표현했고요. 러시아 전쟁 때문에 유럽의 에너지 값이 비싸졌다고 했었죠? 거기에 비하면 미국의 에너지 가격은 셰일혁명과 풍부한 천연가스 매장량 등을 토대로 저렴하고 안정적이니까요. 여기에 IRA를 통해 앞으로 미국에서 생산될 그린수소 등 신재생에너지 가격도 엄청 낮아질 겁니다.
EU 무역장관들의 항의에 "유럽도 역내 기업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라"고 응수한 타이 대표의 발언에는 "억울하면"이라는 단어가 내포돼 있는지도 모릅니다. 억울하면 너희도 기업들에 돈 줘라, 이것이죠. "각자가 보조금, 세금혜택 등을 내세워 바닥까지 치닫는 경주를 피해야만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양측간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질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미국 동맹국들 입장에서는 중국과의 기업 리스크는 상수(常數)였을 겁니다. 공산주의 일당 독재국인 중국에서 자국의 입맛대로 사업 정책을 바꾼다거나 하는 일은 어느 정도 예견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죠. 하지만 바이든 미국 정부의 최근 행보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수(變數)라 각국 정부와 다국적 기업들이 대응책을 고심하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미·중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은 이제 현실입니다. 아마도 유럽 기업들은 지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디가 더 나은 행선지일지 주판알을 두드려보는 데 여념없을 겁니다. 로이터통신과 블룸버그통신 등은 "미국 시장도, 중국 시장도 놓칠 수 없는 유럽 기업들은 생산 설비와 공급망을 중국과 비(非)중국으로 나누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습니다. 투자 비용이 두 배로 드는 일이지만, 종국엔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란 판단을 했을 테죠. 한국 기업들은 지금 어떤 선택지를 고민하고 있을까요?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