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바로크 음악' 쓴 봉준호…다 계획이 있었구나 [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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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 '기생충'미국 최고 권위 영화제인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사진). 강렬한 스토리, 참혹한 핏빛 결말 등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흐르는 음악은 정반대다. 우아한 선율의 바로크 음악(1600~1750년)이 주로 나온다.
기택 가족이 속임수 쓸 때 음악
정재일 음악감독이 급조한
가짜 바로크 음악 '믿음의 벨트'
진짜는 헨델 오페라 '로델린다'
복수 대신 화해·용서의 아리아
상반된 장면과 배치 비극 극대화
기생충에는 바로크 시대에 만든 ‘진짜 바로크 음악’과 영화를 위해 급조한 ‘가짜 바로크 음악’이 섞여 나온다. 가짜는 영화 초반부에 주로 흐른다. 기택(송강호 분)네 가족이 박 사장(이선균 분) 집에 차례로 입성할 무렵이다. 박 사장의 부인 연교(조여정 분)가 ‘믿음의 벨트’를 언급한 직후에 흐르는 음악이 그렇다. 기정(박소담 분)은 연교에게 운전기사를 소개해 주겠다며 아버지 기택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자 연교는 이렇게 답한다. “믿는 사람 소개로 연결, 연결. 이게 베스트인 것 같아. 일종의 뭐랄까, 믿음의 벨트?” 이때 정재일 음악감독이 만든 가짜 바로크 음악 ‘믿음의 벨트’가 나온다. 진짜라고 생각한 연교의 믿음이 실은 가짜였다는 걸 암시한다.진짜 바로크 음악은 언제 나올까. 독일 출신 음악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의 오페라 ‘로델린다’의 아리아가 두 번에 걸쳐 흐른다. 기택의 부인 충숙(장혜진 분)까지 온 가족이 박 사장 집에 입성하게 된 장면에 첫 아리아가 나온다. ‘용서받지 못할 자여, 나는 맹세했노라’라는 곡이다. 두 번째 아리아 ‘나의 사랑하는 이여’는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에서 흐른다. 정원에서 생일 파티를 벌이던 날 성악가는 이 노래를 불렀고, 지하에 살던 근세(박명훈 분)는 지상으로 나왔다.
헨델은 바흐와 함께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다.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만큼 온화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헨델은 의지의 사나이였다. 그는 독일에서 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영국으로 이민 갔다. 그리고 44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썼다. 탁월한 사업 수완으로 영국 국민은 물론 왕실까지 사로잡았다. 그러다 위기가 찾아왔다. 영국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어 음악극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헨델은 당시 영국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전문으로 하는 로열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한 터였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탈리아 오페라로 계속 승부했다. 그러다 1724년 초연한 ‘줄리오 체사레’가 큰 성공을 거뒀다. 자신감을 회복한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에 온 힘을 쏟았다. 1725년 ‘로델린다’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로델린다’는 이탈리아 한 왕국의 왕비인 로델린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는 남편의 왕위를 빼앗은 그리모알도 세력에 맞서 싸운다. 그리모알도는 로델린다에게 연정을 품고 청혼하지만 거절당한다. 이때 나오는 곡이 ‘용서받지 못할 자여, 나는 맹세했노라’다. 잔혹한 파티 장면에 나온 ‘나의 사랑하는 이여’는 복수 대신 화해와 용서를 담은 곡이다. 이렇게 ‘기생충’은 영화 장면과 상반된 아리아들을 배치했다. 의미가 완전히 다른 장면과 음악을 충돌시킴으로써 비극을 극대화한 것이다.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음악에 담았다니, 봉 감독 머릿속엔 ‘다 계획이 있었구나’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관객이 눈치채지 못할 부분까지 정교하고 세심하게 표현했기에 오스카의 영광이 있었던 게 아닐까.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