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광' 마릴린 먼로가 닳도록 읽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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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서의 이유 있는 고전“철학에 미친 독서광.”
윌트 휘트먼
1855년 출간한 '미국 시의 뿌리'
"나는 내가 당당하다는 것을 안다
이해받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아이돌 그룹 ‘(여자)아이들’의 신곡 ‘Nxde(누드)’는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를 이렇게 묘사한다. ‘금발 미녀의 전형’ ‘백치미의 상징’으로 통하는 그 먼로가 맞다.그녀의 금발이 사실은 염색의 결과였듯, 섹스 심볼 이미지 뒤에 있는 진짜 먼로의 삶을 대중은 몰랐다. 그녀가 죽고 난 뒤 경매에 먼로의 애장품이 나왔는데, 거기엔 400권이 넘는 책이 있었다. 문학, 신학 등 분야를 넘나드는 그의 독서 이력은 이렇게 세상에 공개됐다.
월트 휘트먼의 시집 <풀잎>은 그중에서도 먼로가 즐겨 읽은 책이다. 그녀가 이 시집을 읽고 있는 모습은 여러 장소에서 사진으로 찍혔다.
<풀잎>은 미국 시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미국의 가치’로 꼽히는 평등과 자유를 노래하는 시들로 꾹꾹 채워서다. “나는 나 자신을 찬양한다”고 시작하는 대표작 ‘나 자신의 노래’는 민주주의 정신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시라는 평가를 받는다.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휘트먼에 대해 “(유럽의 아류가 아닌) 미국 시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첫 번째 시인”이라고 했다.
신문사 조판공, 교사 등으로 생계를 꾸리던 휘트먼에게 시인은 포기할 수 없는 꿈이었다. 평생 이 한 권의 시집을 내기 위해 씨름했다. 1855년 처음 시집을 낸 이후 사망한 해인 1892년까지 40년간 시를 고치고, 또 고쳤다.
그의 시는 지금도 널리 사랑받는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학생들이 외치는 “오 캡틴, 마이 캡틴”은 휘트먼의 시 중 일부다.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 영화 ‘노트북’에도 휘트먼의 시집이 등장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휘트먼의 시에서 제목을 따왔다.먼로는 왜 이 시집에 빠졌을까. 화려한 은막의 스타와 고독한 독서가 사이, 먼로의 삶은 피로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조차 무시당했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먼로의 말에 한 기자는 “도스토옙스키의 철자를 아느냐?”고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먼로는 이렇게 답했다. “혹시 책을 읽어보셨나요? 거기엔 그루센카라고 하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죠. 나는 내가 그 역할에 아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요.”이런 세간의 오해와 무시에 지친 먼로에게 휘트먼의 시는 한 줌의 위안이 됐다.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내가 당당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영혼 자체를 변호하거나 이해받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이 시를 읽은 먼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당신들이 나를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오직 내가 결정하는데.’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