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미술사 1년 넘게 연구했죠…전시회 본 빈박물관장도 '엄지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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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미술관5만4000여 명. 지난달 25일 개막 이후 17일까지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를 찾은 관람객 수다. 개막 이후 불과 한 달도 안 돼 세운 대기록이다. 이 기간 동안 전시실 앞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나긴 줄이 늘어섰다. 하루 2000명 넘는 인파가 몰리자 박물관 측은 지난 14일부터 반드시 사전예약을 거쳐야 전시를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관람객의 안전과 작품 보호를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역대급 흥행' 합스부르크 전시 이끈 주역
양승미 학예사·이현숙 디자인전문경력관
24일 만에 관람객 5만명 돌파 '대기록'
합스부르크家 조명하려면 유럽사 꿰뚫어야
"페르디난트라는 사람이 왜이리 많은지
작품 한 점 보려고 10시간 기차 타기도"
작품 이해 쉽도록 음악·영상 등에 공들여
작품이 워낙 좋긴 하지만, 수준 높은 전시 구성·디자인이 전시의 품격을 한 단계 더 높였다는 게 관람객들의 평가다. ‘원조’인 빈미술사박물관의 사비나 하그 관장조차 전시장을 직접 둘러본 뒤 “빈미술사박물관 소장품의 해외 전시 중 사상 최고”라고 극찬했다. 이런 찬사를 이끌어낸 두 주인공, 양승미 학예연구사와 이현숙 디자인전문경력관을 최근 기획전시실에서 만났다.
오스트리아 미술 공부만 1년4개월
개막 기자간담회가 열린 지난달 25일, 전시장에서 양 학예사의 설명을 듣던 윤성용 국립박물관장이 수행 직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양 학예사가 오스트리아 미술사 전공이었나?” 인터뷰 자리에서 뒤늦게 이 얘기를 전해 들은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 전공은 러시아 미술입니다. 학부 전공도 노어노문학과를 나왔고요. 그래서 전시 준비를 위해 1년 넘게 공부했습니다.”양 학예사와 이 전문관이 오스트리아 미술사 ‘열공’에 들어간 건 지난해 6월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을 제대로 조명하려면 유럽 전체 역사와 미술사를 꿰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페르디난트’라는 이름의 동명이인은 왜 이리 많은지 원망스럽기도 했죠. 전시 작품 실사와 자료 조사를 위해 오스트리아를 두 번 다녀오고 나니 비로소 감이 좀 잡히더군요. 다른 박물관에 있는 작품 딱 한 점을 보기 위해 왕복 10시간 기차를 타기도 하는 ‘빡센’ 출장이었어요.”전시 구성에는 빈미술사박물관의 적극적인 자료 협조도 큰 도움이 됐다. 이 전문관은 “빈미술사박물과 수백 통에 달하는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매번 바로바로 답이 왔다”며 “작품 정보를 비롯해 고대 독일어 해석, 이미지와 영상 등 다양한 자료를 빠르게 제공받았다”고 했다.
양국을 대표하는 박물관의 노력은 이번 전시에서 결실을 맺었다. 개막식에 참석한 하그 관장은 “우리 미술관의 해외 전시 중 단연 최고다.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며 이 전문관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평균 관람시간 1시간 이상…‘떠나기 싫은 전시장’
이번 전시의 평균 관람 시간은 한 시간 이상. 비슷한 급의 다른 걸작전들과 비교해도 이례적으로 긴 시간이다. 그만큼 전시장이 ‘머무르고 싶은 공간’이라는 뜻이다. 작품 설명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거나, 비치된 헤드폰을 끼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오랫동안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이 많다. 이 전문관은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관람객들이 빈의 문화유산을 찬찬히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빈의 문화를 소개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 음악입니다. 매장음악 서비스 기업 멜론비즈, 류태형 음악평론가 등의 도움을 받아 음악을 선정했어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루돌프 2세의 컬렉션이 놓인 곳에는 루돌프 2세의 궁정 악장(樂長)이던 필리프 드 몽테의 곡이 나오는 식이죠.”영상 제작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전시 도입부인 갑옷 전시 공간에는 갑옷의 디테일을 쉽게 풀어낸 영상을 배치했습니다. 빈미술사박물관에서 열렸던 갑옷 전시의 상세 소개 자료를 썼죠. 아예 새로 만든 영상도 있습니다. 빈미술사박물관 천장에 그려진 합스부르크 가문 ‘대표 수집가’들의 그림에 관한 영상입니다. 전시 주제를 관통하는 그림이라 꼭 소개하고 싶었는데, 천장화를 떼서 빌려올 수는 없으니 영상을 제작했죠. 하하.”
원색 기반의 전시장 벽면 색상에서는 빈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는 게 관람객들의 평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이던 쇤부른 궁전에서 따온 색들이다. 양 학예사는 “큐레이터가 작품을 묶고 내용을 구성하는 데 집중한다면 디자이너는 이를 확장하고 관람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며 “이 전문관과 끊임없이 협의하고 마지막까지 작품 위치를 조정하는 등 치열하게 노력한 덕분에 만족스러운 전시가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이 전문관은 “요즘 미술계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환경 문제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덧붙였다. 전시장 벽 중 상당수는 직전 전시인 이건희 기증 1주년 기념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 썼던 구조물들을 새로 칠하고 고쳐 쓴 것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 제작한 진열장들은 앞으로 열리는 박물관의 다른 전시에서도 재활용한다.
두 사람이 이번 전시에서 가장 내보이고 싶은 공간은 어딜까. 이구동성으로 “꽃 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16~17세기 유럽 미술의 ‘대세’였던 플랑드르 회화의 정수를 모은 작은 방이다. 양 학예사는 “생화와 조화를 섞어 꽂은 꽃병을 통해 플랑드르 ‘꽃 정물화’의 특징을 강조했고, 이 공간에서 동·서·남·북 어디를 바라보든 각기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이 전문관은 “분해와 재조립, 재활용이 가능한 모듈형 벽면을 박물관 최초로 도입했다는 점도 각별하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내년 3월 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