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왕과 양반들, 북벌론에도 모화사상 못 벗어나…청나라 요청으로 파병…'나선정벌'로 변질돼

(119) 효종의 북벌론과 나선정벌 (下)
나선정벌의 2차 전투가 벌어진 송화강과 흑룡강(아무르강)이 만나는 동강시 합강지역. 근처의 전투지구는 한국인의 출입을 금지한다.
인조 때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박연)는 귀화해 무기 제조 등에 참여했다. 이어 표착한 동인도회사의 직원 하멜 등도 군기 개발에 참여했고, 효종도 활용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몽골의 지배를 벗어난 러시아가 17세기 중반부터 헤이룽강(아무르강) 일대에 진출해 부가가치가 높은 담비 가죽을 비롯한 모피 등의 자원을 획득하고, 식민단을 정착시켜갔다. 청나라도 북진하면서 북만주의 삼림과 헤이룽강 상류의 다구르족, 예벤크족 등 소수 종족과 전투를 벌였다.
경기 파주 장릉. 인조와 인열왕후가 합장돼 있다.
따라서 헤이룽강 일대에서 청과 러시아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면전은 고사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는 전술적인 공격조차 불가능했다. 더구나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을 뿐 모화사상은 깊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가진 왕과 양반 사대부라 해도 정치생명과 직결된 모험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없다. ‘북벌론’은 명분과 윤리라는 관점에서는 시대의식과 필요한 행위일 수 있지만 실천이 아닌 명분상의 자존심 회복, 정권 안정이라는 내부용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훗날 숙종과 대원군처럼 망상과 백성을 억압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선례를 남겼다.

가정해 본다. 만에 하나 북벌론이 추진됐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수많은 백성이 살육되고, 포로로 끌려갔으며, 어쩌면 독립마저 상실하고 청 제국의 일개 성(省)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역사에서는 때때로 우연이 발생한다.

북벌 준비는 ‘나선 정벌’이라는 기묘한 사건으로 변형됐다. 러시아와 전투를 벌이며 패배하던 청나라는 북벌론으로 강해진 조선군의 화포 등 무기 수준을 시험하고, 전투력을 소진할 목적으로 조창 사용에 능숙한 병사들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은 두만강을 넘어 1651년 1월 모란강(牧丹江) 상류의 발해 상경성인 영고탑(영안현)에 도착해 청군 3000여 명과 합세했다.

연합군은 북상하다가 혼동강(송화강의 하류)에서 러시아군 400~500여 명과 7일간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다. 청나라는 1658년 다시 파병을 요청했고, 신유(申瀏)는 조총군 200명과 초관 60여 명을 거느리고 출진해 두만강을 건넜다. 영고탑에서 출발한 연합군은 북상해 6월 10일 헤이룽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동장(同江)시 외곽의 강위에서 10여 척의 선박을 타고 러시아 전선과 맞붙었다. 조선의 제안으로 화공을 가해 적선 12척 가운데 11척을 침몰시키고, 지휘관인 ‘스테파노프’와 병사 270여 명을 죽였다. 조선군은 조총의 위력을 실증하면서 실전 경험을 쌓는 전과를 얻었고, 북벌 작전에 필수적인 교통망도 샅샅이 탐지했다.필자는 나선 정벌을 활용하는 조선 정부의 정책을 이렇게 가정해본다. 청나라의 붕괴 등 국제질서 변환기에 동만주, 북만주의 일부, 우수리강, 아무르강 유역으로 진출할 가능성도 점검한다. 자연자원과 종족들을 조사하고, 호란 직후의 회령 개시 등 북관무역을 확장하고 주도한다. 신유가 표현한 대로 강력한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을 기회도 포착한다. 만약에 이런 후속 작업을 충실히 실천했다면 나선 정벌은 ‘꿈’을 넘어 북벌론을 ‘현실’로 탈바꿈할 절호의 기회였다. 실용적 사고를 하는 정약용마저 ‘나선 정벌’이라고 말할 정도로 과대평가됐지만, 조선의 변화는 고사하고, 붕괴를 막는 데도 교훈을 주지 못한 단발적 전투로 끝나버렸다.

냉정하고 과학적이기 그지없는 역사의 세계에서도 때론 터무니없는 ‘꿈’이 현실로 드러난 예가 적지 않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과 헬레니즘 문화, 칭기즈칸의 대몽골, 이민자들이 만든 미국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등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세계는 중국의 분열과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실패를 단정했다. 이 같은 감성적 시류에 부화뇌동한 한국의 ‘그들’은 부국강병에 태만했고, 지금은 굴복한 모습마저 보인다. 늦었지만, 지금 당장 강력한 진짜 ‘한민족 꿈’을 꿔야 하지 않을까.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헤이룽강 일대에서 청과 러시아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면전은 고사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는 전술적인 공격조차 불가능했다. 더구나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을 뿐 모화사상은 깊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가진 왕과 양반 사대부라 해도 정치생명과 직결된 모험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없다. ‘북벌론’은 명분과 윤리라는 관점에서는 시대의식과 필요한 행위일 수 있지만 실천이 아닌 명분상의 자존심 회복, 정권 안정이라는 내부용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훗날 숙종과 대원군처럼 망상과 백성을 억압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선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