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장롱 속 돈다발

2011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울 내곡동 사저 매입과 관련한 의혹이 제기됐을 때 ‘벽장 속 6억원’이 화제였다. 땅을 산 이 전 대통령 아들 시형씨가 이듬해 특검 조사에서 땅값 중 6억원을 큰아버지인 이상은 다스 회장에게 현금으로 빌렸다고 한 것. 이 회장 측은 2005년 무렵부터 개인 계좌에서 1000만~2000만원의 현금을 찾아 자택 붙박이장에 쌓아뒀으며, 이 중 1만원권으로 5억원, 5만원권으로 1억원을 빌려줬다고 해명했다. 검찰은 2018년 재수사에서 이 돈의 출처가 김윤옥 여사인 것으로 확인했지만 이 회장이 벽장에 현금을 쌓아둔 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붙박이장은 잠금장치도 없이 그 앞에 자전거를 세워둬 평범한 벽장처럼 위장했다고 한다.

은행 거래가 보편화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장롱이 금고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거액의 현금을 집안에 보관하고 있다면 뭔가 구리다는 의심을 사기 십상이다. 도난, 화재 등의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현금을 보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장롱 속 현금은 뇌물이나 탈세 자금, 비자금 등 검은돈일 가능성이 크다. 국세청의 고액 세금 상습 체납자들을 조사해 보면 대여금고, 옷장, 비밀수납장 등에 현금이나 귀금속, 달러, 골드바, 명품 시계 등을 숨겨놓는 경우가 많다.2009년부터 발행된 5만원권 환수율이 극도로 낮은 점도 ‘장롱 속 돈다발’을 의심케 한다. 지난달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올해 1~8월 5만원권 환수율은 26.8%에 그쳤다. 2019년(60.1%)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경제적 불확실성 증대로 국민의 현금 보유 성향이 높아진 점, 불황으로 자영업자 등을 통한 화폐 환수가 원활하지 않은 점 등이 원인으로 꼽히지만 지하경제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11년 전북 김제 마늘밭에 묻혀 있던 110억원이 대표적 사례다.

검찰이 18일 뇌물수수·정치자금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집을 추가로 압수수색해 전날 장롱에서 발견한 5만원권 묶음 등 3억원가량의 현금을 압수했다. 노 의원은 부의금이나 출판기념회에서 나온 돈이라고 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는 돈이라면 왜 장롱 속에 뒀는지 석연치 않다.

서화동 논설위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