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처럼 죽을 때까지 그릴겁니다" 10년만에 돌아온 이기봉

이기봉 작가 개인전…국제갤러리 서울·부산 전시

1억 넘어도 '완판'되는 스타 작가
해외 유명 미술관도 다수 소장

작년부터 그린 신작 50점 전시
캔버스 위 폴리 섬유 깔고 붓질
안개 피어오르는 듯 몽환적 연출

10년 전 온 슬럼프…전시 꺼려
어느 순간 '이대론 안 된다' 자성
작품 집중하려 교수직도 그만둬
이기봉 작가가 국제갤러리에서 신작 ‘스탠드 온 섀도-블랙 미러’를 설명하고 있다. 성수영 기자
이기봉 작가(65)의 ‘스펙’은 화려하다. 1986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받으며 20대에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고, 서울대 미대를 나와 고려대 미대 교수와 조형학부장을 지냈다. 독일 ZKM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지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단체전에 초청되는 등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신작들은 아트페어에 나올 때마다 1억원을 넘는 가격에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그의 개인전 소식만큼은 도통 들을 수 없었다. 마지막 전시가 2012년(아르코미술관)이었다.지난 17일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와 부산 망미동 부산점에서 이기봉의 개인전 ‘웨어 유 스탠드(당신이 서 있는 곳·Where You Stand)’가 동시 개막한 건 그래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작품을 부지런히 그리면서도 개인전은 한사코 열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 전시 개막일 국제갤러리에서 이기봉을 만났다.

“세상은 ‘막’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는 작품 얘기부터 꺼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지난해부터 그린 신작 50여 점을 선보였다. 전시장 초입에서는 안개 낀 물가에 있는 버드나무와 수풀 등 풍경을 그린 ‘웨어 유 스탠드’ 연작이 관객을 맞는다. 평범하게 ‘잘 그린’ 흐릿한 초록색 풍경화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작품은 ‘막’으로 덮여 있다. 캔버스 1㎝ 위 높이에 부착된 반투명 폴리에스테르 섬유다. 캔버스에 풍경을 그린 뒤 폴리에스테르 섬유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붓질을 더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설명이다.이 연작은 해외에서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다. “10여 년 전부터 안개를 소재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안개의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원래 좋아했습니다. 독일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걸작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에서도 영향을 받았고요. 작업을 하다 보면 ‘안쪽에 숨겨진 그림이 더 멋있는데, 그냥 막을 씌우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서양인 중에서는 분위기가 으스스하다며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러면서도 그림을 사다가 거실에 걸어놓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하하.”

작품에 숨겨진 의미를 묻자 그는 대뜸 철학 거장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이야기를 꺼냈다. “저자 이름과 제목이 멋있어 보여서 20년 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아직까지 읽고 있습니다. 제가 요약한 책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언어나 감각이라는 ‘막’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다는 것. 멀쩡한 작품 위에 번거롭게 폴리에스테르 천을 씌운 것도 이런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로 120㎝, 세로 180㎝의 대작 ‘패시지 투 일로직 A(비논리로 가는 길 A·Passage to Illogic A)’를 비롯한 무채색 계열의 대작들도 같은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안개 낀 물가의 풍경을 폴리에스테르 섬유 대신 ‘글자’로 덮었다는 게 차이점이다. 멀리서 보면 풍경화지만, 가까이서 보면 무의미한 알파벳들이 모여 수풀 등의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작가는 “심오해 보이지만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서양철학자가 오랫동안 반복해서 연구해온 주제”라며 “이를 그림으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했다.

“피카소처럼 죽을 때까지 그릴 것”

그가 작가가 된 과정은 다른 인기 화가들과 비슷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외골수 기질도 있었다. 시골 마을에서 자랐지만 중·고등학교에서 눈 밝은 미술 선생님들을 만나 여러 기법을 배웠다. 대회에 나갔다 하면 상을 받았고,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 뒤에도 교수들의 인정을 받았다. “인기 화가가 충분히 될 수 있겠다 싶어서 전업 화가가 됐고 금방 성공했습니다. 교수도 됐죠.” 자칫 ‘잘난 척’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러나 10년 전께 슬럼프가 시작됐다. “갑자기 모든 게 지겨워지더군요. 나이가 드니 몸에 힘도 빠지고요. 지난 10년간 개인전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돈도 아쉽지 않고 신작도 계속 그리고는 있으니까 개인전을 열 필요를 못 느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정도에서 만족해선 안 되겠다’ 싶어서 정신을 차렸습니다. 작품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2016년 교수직도 그만뒀습니다. 개인전을 오랜만에 하니 마감에 쫓긴다는 점이 좋네요. 이럴 때 좋은 작품이 나오거든요.”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말에 그는 “피카소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피카소만큼 유명하고 돈이 많은 작가가 되기에는 이미 좀 늦은 것 같습니다. 다만 피카소처럼 늙어 죽을 때까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제 작품은 지금도 계속 발전 중입니다. 더 잘될 일만 남았다고나 할까요. 일단 한번 전시장에 오셔서 작품을 보고 판단하세요.” 그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