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프랑스 혁명에서 탄생한 자유주의, 200년간 생물처럼 진화했다
입력
수정
지면A22
자유주의자유가 화두다. 풍자할 자유, 질문할 자유에 대한 논쟁도 뜨겁다. 하지만 자유를 많이 외친다고 모두가 자유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liberalism)란 무엇일까.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살아온 이력을 듣듯, 자유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를 들여다보는 게 필요하다.
에드먼드 포셋 지음 / 신재성 옮김
글항아리 / 828쪽│4만5000원
英 언론인이 쓴 '정치 3부작' 중 첫번째
1830년대 자유주의 탄생시킨 獨 훔볼트
낡은 정치 질서가 무너진 이후 세계 고민
"국가가 개인 삶 존중해야 한다" 주장
계급·성별 없이 자유 누리는 꿈은 후대 몫
영국의 정치 저널리스트 에드먼드 포셋은 <자유주의>에서 자유주의의 생애를 살핀다. 200여 년에 걸친 자유주의의 흥망성쇠를 집대성했다. 포셋은 30여 년간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워싱턴, 파리, 베를린, 브뤼셀 수석특파원을 지냈고 뉴욕타임스와 가디언 등에 글을 실어왔다.베테랑 저널리스트인 저자도 자유주의를 간단히 요약하지는 못한다. 변화무쌍한 생물체처럼 시대에 따라 자유주의의 목표와 이상이 변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이념을 크게 갈등과 권력, 진보, 존중이란 네 가지 키워드를 들어 이렇게 설명한다. “자유주의는 첫째, 사회의 도덕적·물질적 갈등은 결코 제거될 수 없고, 그저 억제되거나 어쩌면 유익한 방향으로 길들여질 수 있을 뿐임을 받아들인다. 둘째, 정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견제되지 않는 권력에 반대한다. 셋째, 사회적 병폐는 치유될 수 있고 인간의 삶은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다. 넷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거나 어떤 존재이건 간에, 그들의 삶과 계획을 국가와 사회가 법에 기초해 존중한다.”
책은 자유주의라는 개념이 형성돼온 과정을 역사 속 자유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풀어내 시대별 자유주의의 다양성, 각 주장이 태어난 배경과 한계를 자연스레 전달한다.
1830년대 자유주의의 탄생을 설명할 때는 독일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빌헬름 폰 훔볼트의 생애를 보여준다. 훔볼트가 태어나 자란 사회의 혼란, 역동, 모순은 자유주의의 씨앗을 제공했다. 1767년 프로이센의 한 귀족 가문에서 훔볼트가 태어났을 때는 계몽 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이 프로이센을 통치하고 있었다. 제임스 와트는 이 즈음 증기기관의 토대가 될 효율적인 피스톤 작동 방식을 고안했지만, 지방 소도시에는 농노제가 남아 있었다. 유럽의 무역은 식민지 수탈, 노예의 노역에 의지해 이뤄졌다.
1789년 여름, 청년 훔볼트는 프랑스 혁명 직후의 파리를 경험한 뒤 낡은 정치 질서가 무너진 이후의 세계를 고민했다. 그렇다고 혁명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국가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개개인이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는 선출에 대한 의식을 가진 민주주의자가 아니었고, 노동자의 친구도 아니었다. 계급과 출신, 성별에 상관없이 자유를 누리는 사회에 대한 꿈은 후대의 몫으로 남겨졌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란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수용한 ‘타협’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사회주의 세력에 맞서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계를 고수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그 타협은 자유주의의 목표와 이상이 가치 있고 재산이 있는 사회 중추 세력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사회에 하찮고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을 자유주의가 수용한 것이었다.”저자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타협 과정이 우발적이었고 원활하지도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2016~2017년 영국과 미국에서 포퓰리즘의 득세로 자유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듯이 언제든 이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저자는 자유주의에 섣불리 종언을 고하는 것을 경계한다. “만약 21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많은 결점을 일부라도 고쳐보려는 정치적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자유주의를 묻어버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그간 논쟁과 적응을 통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800쪽이 넘는 분량의 압박은 독서의 걸림돌이다. 내용에 깊이가 있는 대신에 가독성이 떨어져 ‘이코노미스트 기자가 쓴 글답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3세기에 걸쳐 주요 정치가와 철학자들을 줄줄이 소환하려면 최소한 이 정도 분량은 필요하겠다’고 수긍하게 된다. 마치 유명 배우가 총출동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볼 때 러닝타임이 길다고 불평하지 않듯이. 정치, 철학, 예술 등 여러 분야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서술 방식도 매력적이다. 참고문헌 목록만 29쪽에 달할 정도로 치열한 취재와 자료 조사를 벌인 결과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