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환율 급등해도 위기 닥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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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1500원 육박, 동요 적어1997년 외환위기는 환율이 2000원 가까이 올라가면서 본격화됐다. 국가부도 직전까지 갔으나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통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환율이 1500원을 넘으면서 금융시장이 위기를 맞았고 미국 중앙은행(Fed)과 통화스와프를 맺고서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한국 경제는 위기 국면마다 환율 급등을 겪었고 이는 일종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환율이 갑자기 오르면 정책당국자가 바짝 긴장하는 이유다.
외환·금융위기 때와 다른 양상
환율 변동 대비한 민간기업 헤징
'순채권국'이어서 환율 안정 효과
취약한 고리는 끊임없이 살펴야
신관호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하지만 최근의 경험은 달라 보인다. 물론 강달러 기조가 환율 상승의 근본 원인이긴 하지만, 한때 원화 환율은 이런 기조를 넘어서 1440원까지 올랐으며, 머지않아 1500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많았다. 또 미국 물가상승률이 예상보다 0.2%포인트 낮았다는 소식에 1주일 만에 환율이 100원 가까이 하락한 바 있다. 궁금한 것은 이렇게 환율이 급등하고 변동성도 높아졌는데 아직 위기가 찾아오지 않은 이유다.사실 환율이 급등한다고 해서 반드시 위기가 오는 것이 아님은 호주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호주 달러는 원화와 비슷할 정도로 매우 변동성이 높은 화폐다. 하지만 호주 경제는 환율이 급등해도 거의 충격을 받지 않는다. 필자는 이런 사실이 놀라워 호주중앙은행 이코노미스트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그의 설명은, 호주달러는 국제화로 통용되고 있고 워낙 변동성이 높아 민간 경제가 스스로 알아서 리스크를 헤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1997년 환율 급등에 깜짝 놀란 이유는 그전까지 환율이 정부의 개입으로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민간은 환율 변동에 대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렇게 방심하면서 달러표시 채무를 늘렸는데, 갑자기 환율이 급등하면서 원화로 환산한 채무의 부담이 치솟으며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의 위기를 통해 우리 민간부문, 특히 대기업들은 어느 정도 환율 변동에 자체적인 헤징을 통해 대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는 2014년 이후 대외 순채권국으로 전환됐다. 이는 환율 변동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환율이 급등하면 달러표시 채무를 지고 있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지만 달러표시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득이다. 환율 급등은 해외에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를 팔아 원화로 환전함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환율 급등이 가져오는 부정적 효과를 줄여준다. 환율이 급등할 때, 내국인이 해외에 투자한 자본이 국내로 회귀한다면 환율을 안정시키는 역할도 수행한다.환율이 급등하면서 금융 시스템이 위기에 빠졌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은행의 해외 부채 때문이었다. 1997년도 마찬가지였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에도 은행들은 달러표시 단기외채를 급속히 늘렸고 이것이 만기 연장되지 않으면서 우리 경제는 위기로 치달았다. 은행이 망가지고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면 기업들도 투자할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실물 부문도 동시에 타격을 받는다. 그래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Fed가 월스트리트에만 특혜를 준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은행들을 구제한 것이다. 이런 위기에서 배운 교훈을 통해 정부는 다양한 거시건전성 규제를 부과해 왔다. 특히 은행에 대해 2010년에 도입한 거시건전성 부담금과 선물환포지션 한도 규제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같은 규제는 은행의 단기 해외 차입을 급속히 낮추도록 강제했고 그 결과 은행들은 대외충격에 강해질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한국 경제는 환율 변동에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체력을 키워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최근 환율 급등은 위기 가능성보다는 물가상승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그 중요성이 옮겨졌다. 하지만 이런 점이 우리 경제가 위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위기는 항상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에서 찾아온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 초기 환율을 급등시킨 주범은 은행이 아니라 증권회사, 보험회사 등 비은행 금융기관이었으며, 당시에는 비은행금융기관에 대한 규제가 전무하다시피 해 큰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따라서 환율 변동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취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끊임없이 살펴서 대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