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심장을 내어준 우편배달부

우표

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
마음 무거워 버스는 빨리 오지 않고
집으로 향하는 길만 자꾸 눈에서 흘러내려
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
다가온 우편배달부 아저씨
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숨 막힌 날
다방으로 데려가 차 한잔 시켜주고우리가 하는 일에도 기쁘고 슬픈 일이 있다며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
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
손목 잡아주던
자전거처럼 깡마른 우편배달부 아저씨
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마음에
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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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민복(1962~)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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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두현의 아침 시편]을 엮은 책 『리더의 시, 리더의 격』. 위 표지를 누르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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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책에 실린 ‘격려’ 부분을 소개합니다. 시에 관한 얘기는 저의 ‘아침 시편’ 내용이고, 뒷부분 ‘우리 인생의 귀인’은 황태인 회장의 체험적 인생 경영론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책에 29꼭지 실려 있답니다.)

함민복 시인을 울린 우편배달부

요즘같이 어려울 때 마음에 위로가 되는 시입니다. 우표로 상징되는 우편배달부의 속 깊은 정이 애잔하면서도 따뜻하지요. 첫 줄에 나오는 ‘판셈’은 빚잔치를 말합니다. 남은 재산으로 빚돈을 모두 청산하고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죠.

함민복 시인은 어려서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인문계 고등학교 대신 수도전기공고로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경주에 있는 월성원자력발전소에서 4년간 일했지요. 이 시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 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라는 대목처럼 그는 월급을 아껴서 집에 우체국 전신환을 또박또박 보냈습니다.

하지만 가난의 굴레에서는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지요. 그사이에 우편배달부는 빚 독촉 우편물을 전하며 안타까워했고요. 급기야 빚잔치를 하고 “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날 “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 그 배달부가 다가왔습니다. “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하고 숨이 막힐 만도 했겠죠.그다음 순간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배달부는 그를 다방으로 데려가 차를 한잔 시켜주고는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 위로하면서 손목을 잡아줬습니다. “자전거처럼 깡마른” 아저씨가 건넨 특별한 격려는 외롭고 쓸쓸한 그의 마음에 붙여준 “따뜻한 우표 한 장”이었지요. 그 우표는 훗날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든든한 디딤돌이 됐습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어릴 적 저에게 힘이 돼줬던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절집에 함께 살던 처사 하석근 아저씨가 밤늦게 저를 밖으로 불러내서는 한참 만에 말을 꺼냈습니다.

“나는 니보다 더 어릴 때 아부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뒤로 한 번도 기를 못 펴고 살았다. 니는 절대로 그러지 마라. 평생 무슨 일이 있어도… 기죽으면 안 된대이.”
그날 밤 아저씨가 해준 그 한마디는 제가 힘들고 지칠 때 기죽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돼줬습니다. 나중에는 <하석근 아저씨>라는 시까지 낳게 해줬지요.‘격려(encouragement)’라는 말은 라틴어 ‘심장(cor)’에서 나왔습니다. 풀이하자면 ‘심장을 준다’는 뜻이지요. 뜨거운 심장을 주듯 마음의 뿌리를 덥혀주는 게 격려입니다. ‘용기(courage)’라는 말 역시 같은 어원에서 나왔으니 그 뿌리도 ‘심장’이지요.

함민복 시인에게는 ‘심장을 내어준’ 사람이 우편배달부 아저씨였습니다. 그 아저씨 덕분에 힘을 얻고 마음을 다잡은 그는 원자력발전소에서 틈틈이 공부해 남보다 늦게 서울예술대학교 문
예창작과에 들어갔습니다. 2학년 때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수많은 시로 사람과 세상을 위로했지요.

그가 강화도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96년입니다. 마니산에 놀러 갔다가 너무 좋아 인근 폐가를 빌려 정착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월세 10만 원짜리 방에서 바다와 갯벌을 노래하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방 가운데 빨랫줄에 걸린 시 한 편을 떼어 출판사로 보내곤 했습니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시 <긍정적인 밥> 부분)라던 시인은 50세에 동갑내기 ‘문학소녀’를 만나 결혼했지요. 둘이서 ‘길상이네’라는 인삼가게를 열었고, 이제는 번듯한 집도 지었습니다. 이만하면 옛날 “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에 비해 ‘큰 부자’가 됐지요. 이런 게 다 “마음에/ 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 우편배달부 아저씨 덕분일 것입니다.

함민복 시인의 심성은 그의 시 제목처럼 “말랑말랑한 힘”과 “선천성 그리움”의 경계에서 피는 꽃을 닮았습니다.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시 <선천성 그리움> 전문)

이 시를 보면서 또 생각합니다. 심장은 왜 왼쪽에 있을까요? 보고 싶으면 두근거리고, 마주 보면 콩닥거리고, 안아보면 화끈거리는 영혼의 숯불이기 때문일까요. 서로 껴안으면서 상대의 오른쪽 가슴을 달구는 “선천성 그리움”의 잉걸불이기 때문일까요. 그곳에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운명 때문에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처럼 화들짝거리고, “내리치는 번개”보다 더 뜨거운 사랑이 혈관처럼 팔딱거립니다.

지금 강화에 가면 시인의 왼쪽에서 “선천성 그리움”의 몸짓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동갑내기 부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로 시작하는 함민복 시 <부부>의 진정한 의미와 인생의 또 다른 속내를 발견할 수도 있답니다.

우리 인생의 귀인

(여기서부터는 황태인 회장의 체험적 경영론입니다.) 함민복 시 <우표>의 우편배달부처럼 여러분에게도 인생의 귀인이 있나요? 저에게는 귀인 하면 곧장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돌아보면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글로벌 기업과 국내 대기업 CEO까지 지냈지만, 당시에는 장차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청년일 뿐이었죠. 그런 저를 따뜻하게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 준 고마운 분이 계십니다.

저는 1970년에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첨단 분야인 전자공학을 꼭 공부하고 싶었기에 재수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서울 정일학원에서 공부하려고 모교 교장 선생님에게 소개받은 홍철화 원장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당시 정일학원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학원이었습니다. 홍철화 원장님은 저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 추천해준 학생이지만 그래도 실력을 검증해봐야겠지?” 저는 일종의 선발 시험을 보고 다행히 좋은 결과를 받아 그해 정일학원 2기생으로 장학금까지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홍 원장님은 몸소 실천하는 젊은 경영인이자 다정다감한 참 교육자였습니다. 그분의 지도 아래 일 년간 열심히 공부하고 마침내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때 원장님은 너무나 기뻐하며 대학 입학금을 흔쾌히 대주고 가정교사 일자리도 마련해주셨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공군 학사장교로 임관해 전역할 때까지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후에도 정일학원 초창기 멤버 30여 명은 원장님을 중심으로 정우회라는 친목 모임을 결성해 수시로 정을 나눴습니다. 2012년에 원장님께서 작고했을 때 나를 포함한 많은 제자가 장지까지 운구하며 슬픔을 함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청년 시절부터 꿈과 희망을 심어준 원장님은 인생의 귀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귀인은 저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고 2012년 입적한 지관스님입니다. 당시 스님께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는 조그만 청룡암 암자에 가서 처음 인사를 드렸죠.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그야말로 눈에 광채가 흐르고 인자하시며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너무나 당돌하게 주례사에 종교적인 말씀은 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너무 철이 없고 당돌했죠. 그날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하는 두 사람이 앞으로 종교를 갖고 안 갖고는 자유지만 너무 어느 한 종교에 집착하지 마시게.”
저는 지금도 그 말씀을 항상 명심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 후 미국 유학 중에도 신문을 통해 지관스님께서 동국대학교 총장도 역임하고, 해인사 주지 스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귀국 후에는 조금 더 한가해지시면 찾아뵈어야지 했는데, 어느 날 경국사에서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가게 되었지요. 그러나 이미 영정 앞에서 눈으로만 얘기할 수 있었죠. 우리에게는 어떤 인연이나 그 인연이 무한정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지금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마지막 귀인은 2001년 작고한 장모님 홍순경 여사입니다. 남다른 지혜와 혜안으로 3남 5녀를 훌륭하게 키우셨고 저에게도 큰 힘이 돼주셨습니다. 귀국한 뒤 매사에 서툴렀던 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미래의 삶을 잘 예견하고 설계하도록 인도해주셨지요.

누구나 살면서 많은 인연을 만납니다. 그 인연을 소중하게 잘 가꾸면서 좋은 일을 쌓아가면 또 다른 귀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두울 때 등불이 되어준 세 분께 지금도 무한히 감사한 마음입니다. 자신에게 힘이 되어준 귀인이 있다면, 지금 바로 마음을 움직여 소중한 인연의 끈을 더욱 두껍게 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일생을 두고 우리에게 큰 재산이 됩니다. 우리가 앞으로 큰 어려움이 닥칠 때나 곤경에 빠졌을 때 누가 귀인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귀인을 내 주변에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인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인복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인복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관계를 충실히 합니다. 우리가 사교적인 태도와 현란한 화술로 사람을 대하다 보면 아는 사람은 많이 생기겠지만 귀인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귀인을 만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귀인을 만나려면 우리가 먼저 호의를 베풀고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려는 마음을 갖고 노력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방법이 서툴러도 진심은 통하게 됩니다. 단순히 사람을 사귀는 테크닉만으로는 귀인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잔재주만 부리면 우리 주변에 남아 있을 사람은 없게 됩니다.

특히 필요에 따라서 관계를 이용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어렵게 유지되던 친구 사이가 어색해지기 쉽습니다. 누구를 대해도 진솔하게 대하는 것만이 귀인을 얻을 수 있고 관계를 길게 지속할 수 있는 길임을 잊지 마세요.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