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 계급 공산당 입당 허용하며 中성장 이끈 장쩌민 전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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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사태 후 덩샤오핑의 강력한 후원으로 최고 권력 올라
은퇴 후에도 영향력 과시…끊이지 않았던 건강이상설·사망설 30일 백혈병 등으로 숨진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은 1989년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뒤 약 15년간 중국 최고 권력을 움켜쥔 채 경제 발전을 지휘한 인물이다. 시진핑 국가 주석의 정적 그룹으로 분류되는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맥)의 '태두'로 불리기도 한다.
톈안먼 사태 직후인 1989년 공산당 13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의 강력한 지지로 당 총서기에 선출된 데 이어 1990년 중앙군사위주석, 1993년 국가 주석에 차례로 취임함으로써 당·정·군을 모두 장악한 1인자가 됐다.
일찍부터 덩샤오핑의 후계자가 될 것으로 예상된 그는 1926년 8월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중일 전쟁과 난징대학살 등을 겪으며 애국심을 키운 것으로 전해진다.
1947년 상하이 교통대 전기학과를 졸업했으며 재학 중 공산당에 입당해 국민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창춘·우한·베이징·상하이 등에서 공업과 전기 분야 공직 경력을 쌓았다. 국무원 제1기계공업부 부장조리(차관보)와 상해전기과학연구부소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으나 문화대혁명 당시 자본주의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당과 공직에서 추방됐다.
복권돼 베이징으로 복귀한 그는 1974년 외사국 부국장으로 승진했으며 1979년 덩샤오핑의 집권으로 개혁파가 득세하면서 본격적인 관운이 열리기 시작했다.
1980년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을 거쳐 1982년 전자공업부 제1부부장에 이어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정부 각료의 반열에 올랐으며 1985년 상하이 시장 겸 부서기가 됐다가 곧 서기로 승진했다. 상하이를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 자본을 유치해 도시 인프라를 확충하는 등 상하이를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시키는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미인 대회를 부르주아적 퇴폐 행위라며 폐지하는 등 사회주의와 조화를 이루는 경제 발전을 추구했다.
상하이 당 서기 재직 당시 톈안먼 시위가 상하이로 번지자 주동자들을 처벌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함으로써 덩샤오핑의 눈에 띄었다. 특히 자오쯔양이 톈안먼 시위로 실각하자 덩샤오핑의 후원으로 13기 4중전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 총서기에 선출되면 당권을 장악했다.
덩샤오핑의 후원으로 총서기가 됐지만, 한때 덩샤오핑으로부터 "개혁·개방사업에 진력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박학다식할 뿐만 아니라 음악과 미술 등에도 조예가 깊어 중국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학식이 높고 교양있는 지식인으로 꼽힌다.
최대 업적은 이른바 혁명 제3세대를 이끌며 중국을 '최대 개발도상국' 반열에 올렸다는 점이다.
서방이 수 세기에 걸쳐 이룬 시장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킴과 동시에 굵직굵직한 정치, 경제, 외교의 이정표를 세웠다.
그의 업적의 근간에는 사회주의 이론상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자본가 계급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한 '3개 대표 이론'이 자리 잡고 있다.
3개 대표 이론의 핵심은 공산당이 ▲ 중국 선진사회의 생산력 발전 요구를 대표하고 ▲ 선진문화의 창달을 대표하며 ▲ 최대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명제를 담고 있다.
이 이론은 2002년 제16차 당 대회에서 중국공산당의 헌법 격인 당장에 정식으로 삽입됐다.
중국을 세계에 알렸다는 것도 장 전 주석의 업적 중 하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으로 '죽의 장막'이라 불리며 폐쇄적이던 국가 이미지를 드높였다.
서방 외세의 침탈의 상징인 홍콩(1997년)과 마카오의 반환(1999년)도 그의 임기 동안 이뤄졌다.
그는 1997년 홍콩 주권 반환식과 1998년 주권 반환 1주년, 2002년 주권 반환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톈안먼 사태를 수습하며 최고 권력에 오른 인사답게 종교 단체인 파룬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티베트 독립 운동에 대한 강력한 조치로 인권을 무시했다는 세계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재임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여러 차례 회담했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는 후진타오 전 주석과 별도로 조전을 보내 애도를 표했다.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과도 자주 교류하며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
2002년과 2003년 각각 당 총서기와 국가 주석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 주며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2005년 3월까지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유지하며 정계 은퇴를 하지 않고 막후 실력자 역할을 했다.
상하이방으로 불리는 그의 측근들을 권력 요직에 포진시키고, 국가안전회의라는 고문 조직을 설립해 막후에서 정치에 개입하는 등 권력 유지 활동을 활발히 실행했다.
은퇴 후에도 자신과 관련된 간행물을 지속해서 출판하며 '출판 정치'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장 전 주석은 여러 차례 건강 이상설이나 사망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특히 2011년에는 미국에 서버를 둔 중국어 사이트 보쉰닷컴이 장 전 주석이 사망했다고 보도했고, 한국·대만·홍콩·일본의 일부 언론도 그가 사망했거나 중태에 빠졌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는 2017년 19차 당 대회에 참석했고, 2019년 신중국 건국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해 후진타오 전 주석, 시진핑 주석과 함께 사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중국 공산당 100주년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달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96세 생일에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되고 당대회 주석단 상무위원 명단에 포함되면서 참석 가능성이 거론됐으나 건강 문제로 불참했다. /연합뉴스
은퇴 후에도 영향력 과시…끊이지 않았던 건강이상설·사망설 30일 백혈병 등으로 숨진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은 1989년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뒤 약 15년간 중국 최고 권력을 움켜쥔 채 경제 발전을 지휘한 인물이다. 시진핑 국가 주석의 정적 그룹으로 분류되는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맥)의 '태두'로 불리기도 한다.
톈안먼 사태 직후인 1989년 공산당 13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의 강력한 지지로 당 총서기에 선출된 데 이어 1990년 중앙군사위주석, 1993년 국가 주석에 차례로 취임함으로써 당·정·군을 모두 장악한 1인자가 됐다.
일찍부터 덩샤오핑의 후계자가 될 것으로 예상된 그는 1926년 8월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중일 전쟁과 난징대학살 등을 겪으며 애국심을 키운 것으로 전해진다.
1947년 상하이 교통대 전기학과를 졸업했으며 재학 중 공산당에 입당해 국민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창춘·우한·베이징·상하이 등에서 공업과 전기 분야 공직 경력을 쌓았다. 국무원 제1기계공업부 부장조리(차관보)와 상해전기과학연구부소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으나 문화대혁명 당시 자본주의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당과 공직에서 추방됐다.
복권돼 베이징으로 복귀한 그는 1974년 외사국 부국장으로 승진했으며 1979년 덩샤오핑의 집권으로 개혁파가 득세하면서 본격적인 관운이 열리기 시작했다.
1980년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을 거쳐 1982년 전자공업부 제1부부장에 이어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정부 각료의 반열에 올랐으며 1985년 상하이 시장 겸 부서기가 됐다가 곧 서기로 승진했다. 상하이를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 자본을 유치해 도시 인프라를 확충하는 등 상하이를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시키는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미인 대회를 부르주아적 퇴폐 행위라며 폐지하는 등 사회주의와 조화를 이루는 경제 발전을 추구했다.
상하이 당 서기 재직 당시 톈안먼 시위가 상하이로 번지자 주동자들을 처벌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함으로써 덩샤오핑의 눈에 띄었다. 특히 자오쯔양이 톈안먼 시위로 실각하자 덩샤오핑의 후원으로 13기 4중전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 총서기에 선출되면 당권을 장악했다.
덩샤오핑의 후원으로 총서기가 됐지만, 한때 덩샤오핑으로부터 "개혁·개방사업에 진력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박학다식할 뿐만 아니라 음악과 미술 등에도 조예가 깊어 중국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학식이 높고 교양있는 지식인으로 꼽힌다.
최대 업적은 이른바 혁명 제3세대를 이끌며 중국을 '최대 개발도상국' 반열에 올렸다는 점이다.
서방이 수 세기에 걸쳐 이룬 시장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킴과 동시에 굵직굵직한 정치, 경제, 외교의 이정표를 세웠다.
그의 업적의 근간에는 사회주의 이론상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자본가 계급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한 '3개 대표 이론'이 자리 잡고 있다.
3개 대표 이론의 핵심은 공산당이 ▲ 중국 선진사회의 생산력 발전 요구를 대표하고 ▲ 선진문화의 창달을 대표하며 ▲ 최대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명제를 담고 있다.
이 이론은 2002년 제16차 당 대회에서 중국공산당의 헌법 격인 당장에 정식으로 삽입됐다.
중국을 세계에 알렸다는 것도 장 전 주석의 업적 중 하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으로 '죽의 장막'이라 불리며 폐쇄적이던 국가 이미지를 드높였다.
서방 외세의 침탈의 상징인 홍콩(1997년)과 마카오의 반환(1999년)도 그의 임기 동안 이뤄졌다.
그는 1997년 홍콩 주권 반환식과 1998년 주권 반환 1주년, 2002년 주권 반환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톈안먼 사태를 수습하며 최고 권력에 오른 인사답게 종교 단체인 파룬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티베트 독립 운동에 대한 강력한 조치로 인권을 무시했다는 세계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재임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여러 차례 회담했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는 후진타오 전 주석과 별도로 조전을 보내 애도를 표했다.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과도 자주 교류하며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
2002년과 2003년 각각 당 총서기와 국가 주석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 주며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2005년 3월까지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유지하며 정계 은퇴를 하지 않고 막후 실력자 역할을 했다.
상하이방으로 불리는 그의 측근들을 권력 요직에 포진시키고, 국가안전회의라는 고문 조직을 설립해 막후에서 정치에 개입하는 등 권력 유지 활동을 활발히 실행했다.
은퇴 후에도 자신과 관련된 간행물을 지속해서 출판하며 '출판 정치'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장 전 주석은 여러 차례 건강 이상설이나 사망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특히 2011년에는 미국에 서버를 둔 중국어 사이트 보쉰닷컴이 장 전 주석이 사망했다고 보도했고, 한국·대만·홍콩·일본의 일부 언론도 그가 사망했거나 중태에 빠졌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는 2017년 19차 당 대회에 참석했고, 2019년 신중국 건국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해 후진타오 전 주석, 시진핑 주석과 함께 사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중국 공산당 100주년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달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96세 생일에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되고 당대회 주석단 상무위원 명단에 포함되면서 참석 가능성이 거론됐으나 건강 문제로 불참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