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와 불안 사이, 서로가 있었다···달리와 로르카[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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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미 알고 있었어. 보통보다 뛰어나려면, 누가 날 기억하게 하려면 모든 걸 추월해야 한다는 걸. 예술도, 인생도 사람들이 믿는 모든 것을 넘어서야 해."
한 남성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합니다.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잘 느껴집니다. 옆에 있던 다른 남성은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봅니다. 그를 신기해하면서도 매력적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폴 모리슨 감독의 영화 '리틀 애쉬: 달리가 사랑한 그림'(2010)의 한 장면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죠. 남다른 성공 욕망을 보이는 인물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1904~1989)입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남성은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입니다. 두 사람은 마드리드 대학에서 만나 친분을 쌓게 됩니다. 로버트 패틴슨이 달리 역을, 자비엘 벨트란이 로르카 역을 연기했습니다. 스페인 중산층에서 태어난 달리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실제 모습도 영화 속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자신만만하고 자기애가 넘쳤죠. "나의 꿈은 내가 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야말로 초현실주의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달리의 내면엔 강한 트라우마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친형이 죽었는데요. 형의 이름은 다름 아닌 '살바도르 달리'였습니다. 형이 죽고 동생이 태어나자, 그의 어머니가 동생에게 형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거죠. 달리는 이 사실을 알고 오랜 시간 괴로워했습니다. 죽은 형을 대신해 살아간다는 무게감에 시달렸죠. 죽음에 대한 불안도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형이 아니라 독자적인 존재임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강박을 갖고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달리의 대표작 '나르키소스의 변형' '기억의 지속' '나의 욕망의 수수께끼' 등엔 그런 상처가 담겨있습니다. '나르키소스의 변형'은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벌을 받은 인물이죠. 나르시시스트였던 달리가 나르키소스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림 왼쪽엔 나르키소스의 모습이 보이고, 오른쪽엔 또 다른 형상이 보입니다. 돌처럼 보이는 이 형상도 나르키소스처럼 자신의 모습에 심취해 있네요. 그런데 그의 몸을 자세히 보면 개미들이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달리 자신을 평생 괴롭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함께 담아낸거죠. 달리를 칭송하면서도 그런 그의 속마음까지 이해한 듯한 시가 있습니다. "오, 올리브 목소리를 지닌 살바도르 달리여!···변치 않는 형태를 찾는 너의 고뇌를 노래하리라." '달리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시인데요. 이 시는 로르카가 썼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보고 급속히 친해졌습니다. 로르카는 민중극의 보급에 힘쓴 인물이며, 희곡 '피의 결혼'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등 명작들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 무대에 꾸준히 오를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내전 당시 파시즘에 맞서 싸우다 38살의 젊은 나이에 학살 당했습니다. 로르카는 생전에 달리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만큼, 두 사람에 대한 소문도 무성했습니다. 달리는 훗날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는 동성애자였고 나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하지만 정작 달리 자신의 감정에 대해선 부정해 왔습니다. 그러다 사망하기 3년 전, 로르카와의 관계에 대해 "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라고 밝혔죠. 달리가 만든 츄파춥스 로고에 로르카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달리는 츄파춥스 창업자 엔리크 베르나트에게 로고를 그려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는 그 로고죠. 그런데 달리가 로르카의 필체를 흉내낸 것이란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에 대해 달리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잠재력을 알아보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불안과 고뇌까지 고스란히 알고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달리와 로르카는 그런 서로가 있었기 때문에 재능을 더욱 펼쳐보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도 가족, 연인, 친구 등 누군가에게 이 같은 존재가 되어보면 어떨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한 남성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합니다.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잘 느껴집니다. 옆에 있던 다른 남성은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봅니다. 그를 신기해하면서도 매력적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폴 모리슨 감독의 영화 '리틀 애쉬: 달리가 사랑한 그림'(2010)의 한 장면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죠. 남다른 성공 욕망을 보이는 인물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1904~1989)입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남성은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입니다. 두 사람은 마드리드 대학에서 만나 친분을 쌓게 됩니다. 로버트 패틴슨이 달리 역을, 자비엘 벨트란이 로르카 역을 연기했습니다. 스페인 중산층에서 태어난 달리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실제 모습도 영화 속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자신만만하고 자기애가 넘쳤죠. "나의 꿈은 내가 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야말로 초현실주의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달리의 내면엔 강한 트라우마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친형이 죽었는데요. 형의 이름은 다름 아닌 '살바도르 달리'였습니다. 형이 죽고 동생이 태어나자, 그의 어머니가 동생에게 형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거죠. 달리는 이 사실을 알고 오랜 시간 괴로워했습니다. 죽은 형을 대신해 살아간다는 무게감에 시달렸죠. 죽음에 대한 불안도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형이 아니라 독자적인 존재임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강박을 갖고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달리의 대표작 '나르키소스의 변형' '기억의 지속' '나의 욕망의 수수께끼' 등엔 그런 상처가 담겨있습니다. '나르키소스의 변형'은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벌을 받은 인물이죠. 나르시시스트였던 달리가 나르키소스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림 왼쪽엔 나르키소스의 모습이 보이고, 오른쪽엔 또 다른 형상이 보입니다. 돌처럼 보이는 이 형상도 나르키소스처럼 자신의 모습에 심취해 있네요. 그런데 그의 몸을 자세히 보면 개미들이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달리 자신을 평생 괴롭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함께 담아낸거죠. 달리를 칭송하면서도 그런 그의 속마음까지 이해한 듯한 시가 있습니다. "오, 올리브 목소리를 지닌 살바도르 달리여!···변치 않는 형태를 찾는 너의 고뇌를 노래하리라." '달리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시인데요. 이 시는 로르카가 썼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보고 급속히 친해졌습니다. 로르카는 민중극의 보급에 힘쓴 인물이며, 희곡 '피의 결혼'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등 명작들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 무대에 꾸준히 오를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내전 당시 파시즘에 맞서 싸우다 38살의 젊은 나이에 학살 당했습니다. 로르카는 생전에 달리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만큼, 두 사람에 대한 소문도 무성했습니다. 달리는 훗날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는 동성애자였고 나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하지만 정작 달리 자신의 감정에 대해선 부정해 왔습니다. 그러다 사망하기 3년 전, 로르카와의 관계에 대해 "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라고 밝혔죠. 달리가 만든 츄파춥스 로고에 로르카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달리는 츄파춥스 창업자 엔리크 베르나트에게 로고를 그려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는 그 로고죠. 그런데 달리가 로르카의 필체를 흉내낸 것이란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에 대해 달리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잠재력을 알아보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불안과 고뇌까지 고스란히 알고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달리와 로르카는 그런 서로가 있었기 때문에 재능을 더욱 펼쳐보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도 가족, 연인, 친구 등 누군가에게 이 같은 존재가 되어보면 어떨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