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고요? 이건 아프리카의 비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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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캇컨템포러리 '아나추이展'비만과 성인병의 원흉 취급을 받는 설탕은 근대 초기만 해도 많은 국가에서 비싸고 귀한 사치품이었다.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가 열대·아열대 지역에서만 자라기 때문이다.
유럽인 대부분이 설탕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동원해 사탕수수를 대량으로 재배하기 시작하면서다. 16~18세기 유럽인과 미국인들은 사탕수수 부산물을 수입해 럼주를 만들었고, 이를 아프리카로 가져가 노예를 산 뒤 서인도제도에서 팔아 차익을 남기는 ‘삼각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프리카인이 죽거나 다치고, 대대손손 착취당하는 노예로 전락했다.엘 아나추이(78)가 술병 뚜껑으로 아프리카의 전통 예술품을 연상하는 조형 작품을 만드는 것은 관람객에게 이런 비극적인 역사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가나에서 태어나 나이지리아에서 주로 활동해온 아나추이는 201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평생공로상(황금사자상)을 받은 세계적인 작가다. 중형 작품 한 점 가격이 수십억원에 달한다.
서울 삼청동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부유하는 빛’은 아나추이의 작품을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그의 한국 전시는 2017년 이후 5년 만이다.
강렬한 붉은 색 병뚜껑으로 만든 ‘제너레이션 커밍(Generation Coming)’을 비롯한 그의 작품 대부분은 작가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제작한 것이다. 갤러리 관계자는 “아프리카 주민들이 수입 술 병뚜껑을 엮어 작품으로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삼각무역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전시장에 나온 신작 10여 점은 이전 작업보다 더욱 섬세해서 조형 작품이라기보다 회화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나무 패널을 불로 지지고 그 위에 색을 입힌 목조 부조, 작가의 작품에서 따온 문양을 입힌 판화 작품에서는 아나추이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압권은 창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을 받아 갤러리 한쪽 벽 전체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뉴월드 심포니(New World Symphony)’다. 이화령 바라캇컨템포러리 이사는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무렵 작품이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고 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9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