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에도 투자 80% 증가…질주하는 '농슬라' [긱스]

'애그테크' 스타트업 주목
기후변화, 전쟁, 팬데믹 등으로 인한 미래 먹거리 걱정은 애그테크(농업기술)가 떠오르는 계기가 됐습니다. 전 세계 애그테크 스타트업은 지난해 60조원 넘는 벤처투자금을 끌어모았는데요. 팬데믹 속에서도 전년보다 80% 이상 늘어난 금액입니다. 올해 국내에선 스타트업 트릿지가 유니콘 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이 됐습니다. 한경 긱스(Geeks)가 국내외 애그테크 스타트업들을 들여다봤습니다.
농업계 테슬라를 꿈꾸는 존디어는 자율주행 트랙터를 선보였다. 한경DB
세계 1위 농기계 브랜드 존디어 운영사인 디어앤컴퍼니엔 농기계 업계의 테슬라란 뜻인 '농슬라'라는 별칭이 붙는다. 단순 농기계 제조사를 넘어 애그테크(농업+기술) 회사로 변모하고 있어서다. 올 초 세계 최대 IT·가전 박람회 CES2022에선 완전자율 트랙터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 회사의 존 메이 최고경영책임자(CEO)는 내년 초 열리는 CES2023에서 기조연설자로 나선다. 농기계 회사가 CES에서 기조연설을 맡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통상 CES는 한 해 동안 주목받을 산업의 흐름을 보여주는 인사들을 기조연설자로 선정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식량난, 급변하는 기후 등 대외 환경 변화가 애그테크를 새로운 산업 트렌드로 밀어올렸다는 분석이다.

애그테크가 산업의 화두로 떠오르자 관련 스타트업들도 주목받고 있다. 농식품 투자 플랫폼 애그펀더에 따르면 2020년 278억달러(약 36조9000억원)던 글로벌 농식품 관련 스타트업 투자 규모는 지난해 517억달러(약 68조6000억원)로 80% 넘게 늘었다. 국내에서도 애그테크 유니콘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이 나오는 등 성장세가 주목받고 있다.
트릿지는 연중무휴 열리는 온라인 무역 박람회를 내놓을 예정이다.

농축수산물 유니콘 된 트릿지

6일 스타트업 업계에 따르면 농축수산물 데이터 플랫폼 스타트업 트릿지는 온라인 농업 무역 박람회를 준비하고 있다. 연중무휴 형태의 온라인 박람회를 통해 농업계 구매자와 공급자를 상시 연결해주는 게 목표다. 트릿지 관계자는 "수많은 농장주와 바이어들이 파트너를 찾기 위해 수천만원의 비용을 감수하고 박람회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며 "농식품업계에선 파트너를 찾는 일만큼 애먹는 일이 없다"고 설명했다.

트릿지가 준비 중인 온라인 박람회 솔루션의 핵심은 '기술 융합'이다. 농장과 공장을 360도 카메라로 촬영해 바이어가 실제로 방문한 듯한 느낌을 주는 '가상 투어' 서비스를 만들 예정이다. 또 빅데이터를 활용해 가장 많이 방문한 부스, 가장 많이 팔린 제품 등의 통계를 볼 수 있는 대시보드 서비스도 내놓는다. 농업계에 기술을 접목해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겠다는 데 가치를 뒀다.

트릿지는 처음부터 기술에 방점을 찍은 회사다. 자체 구축한 농산물 데이터 플랫폼과 풀필먼트 서비스를 통해 정보 비대칭과 비효율을 줄이는 게 목표다. 확보한 농산물 데이터는 15만 종이 넘는다. 지난 9월엔 500억원 규모 시리즈D 투자를 유치하며 농식품업계 첫 유니콘기업이 됐다. 이 때 인정받은 기업가치는 3조원이 넘는다.

떠오르는 국내 애그테크 스타트업들

트릿지의 사례처럼 애그테크는 국내 스타트업 사이에서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그린랩스는 농업 데이터 플랫폼 '팜모닝'을 운영 중이다. 팜모닝은 농작법이나 정부 보조금, 농산물 경매 시세와 같은 농민 맞춤형 정보를 제공한다. 130만 농가 가구 중 절반 이상이 사용하는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이미 수천억원대의 기업가치를 평가받고 있어 향후 유니콘기업 등극이 기대된다는 평가다. 그린랩스의 강점 역시 '기술'이다. 핵심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이다. 우선 팜모닝이 농민들의 필수 앱이 되기까지는 데이터의 힘이 컸다. 발로 뛰며 모은 농산물 보조금 정보나 스마트팜 센서를 통해 수집한 작물 생육 정보와 같은 데이터들은 농가의 수확량 향상에 도움을 줬다. 시장 규모에 비해 파편화, 아날로그화돼 있던 농업계에 혁신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AI와 데이터를 활용, 농산물 생산자와 공급자를 연결해주는 '신선하이' 같은 플랫폼은 유통 단계를 간소화해 비용 절감에 도움을 줬다는 설명이다.
아랍에미리트 정부 관계자들과 민간 투자자들이 국내 스타트업 엔씽이 수출한 모듈형 수직농장을 둘러보고 있다. KOTRA 제공
애그테크 스타트업 엔씽은 모듈형 스마트팜 솔루션을 내놨다. 사물인터넷(IoT) 기반 자동화 운영 시스템, 식물 생장 LED, 순환식 수경재배 기술 등을 보유하고 있다. 빛의 질이나 양, 대기질, 온습도 등 외부 환경을 통제해 작물의 수확량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2020년과 올해 CES에서 혁신상과 최고혁신상을 수상, 2관왕을 달성하기도 했다. 또 사막으로 식물 재배가 어려운 아랍에미리트(UAE) 지역에 스마트팜 솔루션을 수출하는 성과도 거뒀다. 회사는 삼성증권을 상장 주관사로 선정, 기업공개(IPO)를 준비 중이다.

그런가 하면 2011년 문을 연 록야는 종자 개발, 판매, 그린 바이오 사업 등을 하고 있다. 데이터 분석 자회사인 팜에어를 통해 농산물 가격 분석, 예측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

글로벌 식량 위기... 애그테크로 눈 돌리는 세계

애그테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글로벌 식량난 탓이 크다. 유엔(UN)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달 세계식량가격지수는 135.7이었다. 세계식량가격지수는 FAO가 곡물·유지류·육류·유제품·설탕 등 5개 품목군별로 가격을 지수화한 것이다. 2014~2016년 평균을 100으로 두고 비교한 수치다. 이 지수는 지난 3월 159.7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점차 하락 중이다. 다만 6~8년 전과 비교해 여전히 30% 이상 높다. 유엔은 전 세계 8억 명 이상이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후위기는 식량난을 심화시켰다. 곡물의 주요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전쟁은 곡물 수출 선박이 항해하는 흑해를 봉쇄시켰다. 지난달 흑해 곡물 협정이 4개월간 연장돼 내년 3월까진 뱃길이 열렸지만 수출량이 여전히 전쟁 전과 비교하면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다. 또 당초 유엔과 우크라이나는 이 협정을 1년간 연장하길 원했지만 러시아의 반대로 기간이 4개월로 쪼그라들었다. 그와중에 한 쪽에선 극심한 가뭄이, 한 쪽에선 홍수가 잇따랐다. 몇 년 간 이어진 팬데믹도 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한국도 상황이 좋지 않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그룹에 따르면 한국의 식량안보지수는 71.6으로 32위에 그쳤다. 2017년(26위)부터 꾸준히 순위가 내려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선 27위로 최하위권이다.

악재 속에서 세계는 먹거리 고민을 덜어줄 애그테크로 눈을 돌렸다. 애그펀더는 "기후변화와 전쟁, 팬데믹 같은 대형 악재는 농식품 기술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게 된 배경"이라며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지키기 위한 투자라는 점에서 위기에도 폭발적으로 신규 투자가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또 임팩트 투자사인 소풍벤처스의 최범규 심사역은 "농식품 산업은 유엔의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의 17개 목표와 모두 직간접적으로 맞닿아있기 때문에 이 분야 투자는 인류와 지구의 지속가능성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파머스비즈니스네트워크(FBN)는 일찌감치 유니콘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진=FBN

글로벌 애그테크 유니콘은

글로벌 무대에선 농업계 구글을 꿈꾸는 미국의 스타트업 파머스비즈니스네트워크(FBN)가 주목받는다. 구글벤처스의 투자를 받은 FBN의 기업가치는 40억달러(약 5조2000억원)에 육박한다. 처음엔 농부들끼리 작물 재배법 같은 정보를 공유하는 일종의 커뮤니티 플랫폼으로 출발했다. 이후 토양 데이터를 분석해 땅에 맞는 적합한 종자를 추천해주는 '시드 파인더'를 내놨다. 모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농가들의 작물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 비전펀드가 2억달러(약 2500억원)를 투자한 미국의 플렌티도 눈길을 끈다. 수직농장 분야에 강점을 지닌 회사다. 수직농장은 작물을 담은 선반을 층층이 쌓아 수직 형태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수확량이 전통 농경지보다 30배 이상 많은 게 특징이다. 플렌티가 내놓은 수직농장은 LED로 된 벽면에서 농작물을 키운다. 온도와 습도는 자동으로 조절되고, 물도 재활용한다.

또 미국 스마트팜 스타트업인 바워리파밍은 지난해 구글과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 등으로부터 3억달러(약 4000억원)를 투자받기도 했다.

그간 애그테크 분야 인수합병(M&A)도 활발히 이뤄졌다. 존디어 운영사 디어앤컴퍼니는 지난 5년간 약 60억달러(약 7조5000억원)를 들여 12개 이상의 회사를 사들였다. 지난해엔 자율주행 트랙터 개발 스타트업 베어플래그로보틱스를 2억5000만달러(약 3200억원)에 인수하기도 했다. 또 스위스 기반 농약, 종자 회사 신젠타나 미국 기상 데이터 회사 클라이밋코퍼레이션 등도 또다른 대형 회사에 인수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한국의 존디어로 불리는 국내 농기계 1위 회사 대동은 올 초 현대오토에버와 합작사 대동애그테크를 설립했다.

애그테크 스타트업과 협업나서는 기업들

국내 대기업·중견기업들도 트렌드에 발맞춰 애그테크 스타트업과 협업을 이어가는 추세다. 대표적으로 SK그룹의 투자 전문 회사 SK스퀘어는 지난해 말 그린랩스에 350억원을 투자했다. 농산물 유통 분야에서 SK그룹 계열사인 11번가와 그린랩스의 신선하이 등과 협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중이다. 다만 SK그룹이 협업 모델을 찾지 못하더라도 급성장 중인 애그테크 산업을 고려하면 향후 매각 시 충분한 투자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유통업계 '공룡'으로 자리매김한 컬리는 올 상반기 록야에 100억원을 베팅했다. 컬리는 록야의 스마트팜 등 애그테크 기술을 활용, 신선 식품의 품질 관리 수준을 높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록야가 가진 AI 기반 농산물 가격 예측 기술과 컬리가 보유한 판매 데이터를 결합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밖에 이마트는 유진투자증권이 결성한 펀드에 출자자(LP)로 참여해 엔씽에 간접 투자했다. 소규모지만 직접 지분투자도 했다. 엔씽과의 협업을 통해 스마트팜 농작물 '뿌리가 살아있는 채소' 제품들을 내놨다. 또 트릿지는 델몬트, 월마트, 까르푸 등 도소매 기업 뿐만 아니라 호주 농림부, 싱가포르 식품청, 맥킨지 등 국내외 기관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직접 이 분야에 뛰어드는 기업도 나온다. 올 초 대동그룹은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오토에버와 손잡고 합작사인 대동애그테크를 설립했다. 정보통신기술(ICT), AI, 자율주행 농기계, 농업 로봇, 정밀농업 솔루션 등에서 손을 맞잡을 예정이다.

참, 한가지 더

애그테크 분야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VC도 있다. 소풍벤처스가 대표적이다.

소풍벤처스는 한국농업기술진흥원과 농림축산식품부 등과 함께 농식품 기술창업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3년간 총 33개 스타트업이 이 프로그램을 거쳐갔다. 노지 작물 재배 관리 최적화 솔루션을 개발하는 에이아이에스, 농산물 직거래 주문 솔루션 스타트업 에이임팩트, 식용 곤충 사육 스마트팜을 내놓은 반달소프트, 농기계 관리 서비스를 선보인 크래블, '못난이' 농산물 정기배송 서비스 캐비지 등이 주요 포트폴리오 회사다.소풍벤처스 관계자는 "농식품 산업은 반도체나 완성차보다 10배 이상 큰 시장 규모를 갖고 있지만 디지털 전환이 여전히 더딘 분야"라며 "파괴적 혁신이 이뤄질 수 있는 잠재력이 큰 시장이기 때문에 농식품 분야 투자에 집중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또 애그테크 밸류체인은 환경, 기계, 일자리, 물류, 식품, 건강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산업이 얽혀있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