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울린 베토벤…87세 거장은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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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세계 최초 국제우주정거장 생중계지난달 23일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시 기세이 분카홀. 일본 출신의 세계적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87)가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휠체어에 의지한 왜소한 몸으로 무대에 올랐다. 2010년부터 식도암 투병으로 공연장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그가 지휘단에 선다는 소식에 일본은 물론 해외에서도 관심이 집중됐다. 미국의 정상급 오케스트라 보스턴 심포니를 30년간 이끈 명지휘자로 전 세계에서 그의 연주를 기다리는 클래식 음악 팬이 적지 않았기 때문. 이번 공연이 지상에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 선율을 세계 최초로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생중계하는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 프로젝트의 일환이란 점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일본우주항공연 프로젝트
식도암 투병으로 왜소해진 몸
휠체어 의지한채 지휘단 올라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와
에그몬트 서곡으로 막 올려
젊은시절의 강렬함 없었지만
예민하고 명료한 손짓은 여전
이날 공연은 일본의 명문 관현악단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으로 막을 올렸다. 몸이 불편한 탓에 지휘자에게 으레 기대하는 큰 동작과 강렬한 눈빛은 없었지만, 어깨 아래에서 예민하게 움직이는 오자와의 손짓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했다. 절도 있는 그의 지휘에 전체 오케스트라는 마치 한 명의 연주자가 선율을 뽑아내듯 응축된 소리로 반응했다.명장의 실력은 여전히 빛났다. 단 하나의 음도 오자와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불편한 몸에도 발까지 구르며 온몸으로 지휘하는 그의 열정에 단원들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연주에 집중했다. 그렇게 오자와의 손에서 탄생한 베토벤의 작품은 웅장하면서도 유려한 선율의 매력을 온 우주에 흩뿌렸다.모두가 프로젝트의 성공을 실감한 순간. 예상치 못한 오자와의 반응에 공연장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그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권위의 브장송 국제 지휘 콩쿠르 우승, 최정상 오페라 악단 빈 슈타츠오퍼 음악감독 역임, 일본인 최초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 지휘 등 일본 클래식 음악계의 새 역사를 써온 그가 자신의 심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북받치는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에 단원은 물론 ISS에서 연주를 감상한 일본인 우주비행사 와카타 고이치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 음악 하나로 감정을 공유하는 순간이었다.
감정을 추스른 뒤 마이크를 잡은 와카타는 “지구에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의 공연 실황을 이곳 ISS에서 들을 수 있는 건 너무나 큰 행운”이라며 “이 프로젝트가 세계를 하나로 묶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또 “이 화합의 정신이 과학, 기술, 음악이 모든 장벽을 초월해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란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하고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해줄 것”이라고 화답했다.JAXA 주도의 프로젝트 ‘원 어스 미션(ONE EARTH MISSION)’은 전 세계로 퍼진 코로나19 바이러스,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고통의 시대를 마주한 지금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분열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협력으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날 무대에 오른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는 1984년 ‘일본 지휘계의 대부’로 불리는 사이토 히데오를 기리기 위해 오자와 주도 아래 발족한 관현악단이다. 그 인연을 토대로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무대에서 단원들은 모두 ‘원 어스 미션’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연주했다. 음악이 언어와 인종은 물론 시공간을 초월해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무대였다. 오자와는 공연 이후 서면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같은 행성에 사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주에 공연 실황을 전하는 뜻깊은 경험을 할 수 있어 매우 기쁘다. 와카타를 직접 만나 우주에서 우리의 음악이 어떻게 들렸는지 감상평을 꼭 들어보고 싶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