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하자마자 수백억"…창업 뛰어든 前 티몬 의장의 비밀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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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상반기 티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유한익 당시 의장이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쿠팡 창립멤버 출신으로 국내 이커머스 1세대로 꼽히는 유 의장의 거취에 업계의 눈이 쏠렸는데요. 대기업 유통그룹들이 그에게 커머스 미래 전략을 담당하는 부사장급 자리를 제안하며 러브콜을 보냈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창업이었습니다. 스타트업 대표가 된 티몬 의장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요? 한경 긱스(Geeks)가 그를 만나봤습니다.지난해 7월 문을 연 모바일 커머스 스타트업 RXC는 설립과 동시에 20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시드(초기) 라운드에서, 그것도 창업과 동시에 수백억원대 투자금을 유치하는 건 이례적인 사례다. 지난 5월엔 프리 시리즈A 라운드에서 다시 한 번 200억원을 조달했다. 설립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400억원의 '잭팟'을 터뜨린 '스타' 스타트업으로 자리매김했다.회사에 베팅한 투자자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아모레퍼시픽이나 F&F 같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LB인베스트먼트, 미래에셋벤처투자, 네이버-소프트뱅크 합작사 Z홀딩스의 ZVC 등이 회사의 성장성에 높은 점수를 줬다. 예상보다 많은 돈이 몰려 오히려 투자금을 줄이는 과정을 거쳤다는 후문이다.
투자자들이 아무것도 없는 회사에 수백억원을 싸들고 몰려간 건 RXC가 그린 청사진 덕분이다. RXC의 주력 서비스인 '프리즘'은 국내 최초 '리테일 미디어' 플랫폼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웠다. 커머스 플랫폼에 라이브 방송, 경매, 래플(추첨) 같은 디지털 콘텐츠를 붙인 게 핵심이다. 단순히 수수료나 검색·베너형 광고로 수익을 내던 커머스 플랫폼과는 달리 미디어 회사가 하던 다양한 광고를 수익 모델로 활용할 수 있는 이유다.
물론 회사 구성원의 역량도 투심을 이끄는 데 한몫했다. 커머스업계를 주름잡던 대표와 커머스 '히트작'들을 내놓은 개발자 군단이 이끄는 회사라는 점에서다. 투자자들은 RXC가 커머스 시장에 새로운 파도를 몰고 올 것으로 보고 있다.
쿠팡과 티몬…이커머스 포문 열다
13일 한경 긱스와 만난 유한익 RXC 대표(사진)는 국내 이커머스 1세대로 꼽힌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글로벌 컨설팅 회사 베인앤컴퍼니에서 일하던 그는 2010년 쿠팡의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스타트업'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할 때였다. 잘 나가는 컨설턴트 자리를 포기하고 월급 50만원 받는 벤처기업으로 이직한다는 건 당시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주위에선 좋은 직장을 박차고 나가는 그에게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26살이던 그는 성장하는 조직에서의 '도전'을 택했다.유 대표는 "막상 스타트업으로 옮겨보니 컨설팅 회사를 다니면서 멋진 PPT를 만들고 고객사 임원에게 칭찬받는 삶보다 발로 뛰어다니며 영업하는 게 더 재밌었다"고 회상했다.스타트업 업계에 발을 들인 유 대표는 이 때부터 창업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회사를 어떻게 꾸릴지 고민하던 중에 컴퍼니빌더인 패스트트랙아시아를 만났다. 패스트트랙아시아 공동대표엔 당시 티몬 대표를 지내던 신현성 전(前) 티몬 의장이 있었다. 티몬이 막 소셜 커머스 샛별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티몬은 종합 이커머스 회사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 전 의장은 유 대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 대표는 "애초 커머스가 싫어서 쿠팡을 떠난 건 아니었고, 급성장하는 조직에 한 번 더 몸담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정해진 다음 행선지는 티몬이었다. 2012년 입사 이후 티몬에서 유 대표의 역량은 꽃을 피웠다. 처음 맡은 프로젝트가 당시 국내 이커머스 최초 생필품 묶음배송 서비스인 '슈퍼마트'였다. 2015년 하반기 선보인 이 서비스는 쌀이나 생수, 라면, 주방세제와 같은 제품들을 최저가로 소량 구매한 뒤 빠르게 집에서 받아볼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유 대표는 "여러 커머스 회사가 신선식품 당일배송을 선보이는 최근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서비스"라며 "덕분에 소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꽤 탔다"고 설명했다. 슈퍼마트의 흥행 덕분에 2015년 1959억원이던 티몬의 매출은 이듬해 2644억원, 2017년엔 3572억원까지 뛰었다. 2018년엔 매출 5000억원을 넘겼다.유 대표는 경영전략실장, 핵심사업추진단장, 최고사업책임자(CBO) 등을 거쳐 2017년 티몬의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그해엔 그가 CBO 재임 시절부터 준비하던 라이브커머스 서비스인 '티비온'이 출시됐다. 그는 일찌감치 미디어 커머스를 티몬의 미래 먹거리로 낙점했다. 티비온은 이커머스업계에서 '라방' 시장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로 있던 시절 그는 정체됐던 티몬의 성장세를 다시 한 번 끌어올린 '구원자'로 꼽힌다.
유 대표는 "쿠팡에서 급격히 성장하는 스타트업 생태계를 경험했다면, 티몬에서는 내가 원하던 사업을 체계적으로 짜고 쌓아나가는 경험을 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최연소 티몬 의장, 창업의 길로
1985년생인 유 대표는 2018년 말엔 불과 33세의 나이로 티몬 이사회 의장이 됐다. 모든 것을 다 이뤘다는 부러움의 시선을 받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창업의 꿈을 꿨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도전하고 싶었다. 이커머스가 시장의 주류로 떠올랐지만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기로 했다.그는 "천편일률적인 '원 오브 뎀' 형태의 커머스 플랫폼엔 입점하지 않으려는 브랜드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지켜봤고, 그들은 인스타그램 같은 SNS를 활용해 마케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결국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중시한다는 뜻이었고, 그럼 그들을 멋져보이게 만들어주는 플랫폼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해 티몬 의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창업의 길로 뛰어들었다. 티비온 프로젝트 시절 함께 하던 20여 명의 화려한 개발자 군단과 손을 잡았다. 모바일 콘텐츠 플랫폼 '피키캐스트'를 만든 팀이다. 무신사에 인수되며 성공신화를 써내려간 29CM와 스타일쉐어도 이 팀의 손에서 나왔다.
든든한 병사들로 무장한 '유한익호(號)'는 새로운 커머스 플랫폼인 프리즘을 만들었다. 프리즘이 지향하는 가치는 '발견형 쇼핑'이다. 유 대표는 소비자들이 점점 '목적형 쇼핑'에서 발견형 쇼핑으로 옮겨가는 중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예전엔 소비자들이 살 물건을 정한 뒤 플랫폼에 와서 상품을 구매했다면, 이제는 플랫폼에 놀러와서 다양한 콘텐츠를 구경하고 우연히 마음에 드는 제품을 발견한 뒤 구매로 이어지는 구조"라고 말했다.프리즘에서 눈에 띄는 서비스는 라이브 기능이다. 라이브 경매 서비스 '슬라이딩'은 시청자가 화면을 왼쪽으로 밀면 입찰할 수 있게 했다. 한정판 스니커즈 같은 구하기 어려운 제품들이 주요 경매 대상이다. 사전 응찰 방식이 아닌 실시간 경매라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더 높다는 설명이다. 평균 시청시간이 1~2분 밖에 되지 않는 기존 라이브 커머스에 비해 흡입력도 더 좋다. 또 보증금을 맡겨야 응찰할 수 있도록 해 경매자의 안전성도 보장했다. 추첨 라이브 기능인 '와우드로우'도 주목받는다. 특정 상품을 실시간으로 추첨해 시청자들 중 당첨자를 정하는 방식이다. 진행자가 추첨 버튼을 누르면 방송에 '접속해 있는' 시청자들 중 무작위로 당첨자가 선정된다. 유 대표는 "통상 25분의 방송 시간 중 평균 17~18분의 시청 시간이 나올 만큼 반응이 좋다"며 "광고 모델로 확장하기 적합한 기능"이라고 설명했다.
그밖에 이미지와 영상으로 브랜드를 홍보할 수 있는 '브랜드 쇼룸'이나 브랜드 대표자와의 토크쇼 등으로 구성된 '브랜드 베네핏', 라이브 드로잉 등으로 실시간으로 아티스트와 소통할 수 있는 '오버 더 캔버스' 등도 프리즘이 내세운 주요 서비스다.
탄탄한 개발진은 프리즘에 기술력을 불어넣었다. 우선 일반적인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보다 화질을 3배 이상 높였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도 앱이 충돌하는 현상인 크래시율을 0.03% 수준까지 낮췄다고 한다. 통상 1% 미만으로 크래시율을 유지해야 앱의 안정적인 구동이 가능하다고 평가받는다. 또 앱의 용량을 40MB 수준으로 유지해 가볍게 디자인했다. 유 대표는 "대형 앱을 만들어 본 개발진 덕분"이라며 "기능을 덕지덕지 붙여 용량이 불어나는 실수를 하지 않고, 처음부터 최적화된 설계방식을 사용했다"고 했다.
덕분에 프리즘에는 MZ세대에게 관심을 받는 '힙'한 브랜드들의 입점이 늘어나고 있다. 프리즘이 만든 용어는 '힙스티지'다. 힙과 프레스티지(Prestige)를 합친 단어다. 특정 집단에 팬덤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너무 싸구려 같지는 않은 힙스티지 브랜드가 모여 있다. 시엔느, 몬스트럭쳐, 차홍, 톤28, 노앙, 오어 등 100여 개의 브랜드가 들어왔다.
"브랜드 중심 플랫폼 될 것"
반응은 좋았다. 프리즘의 가입자 수는 35만 명을 넘어섰다. 1만명 이상의 동시 접속자 수를 기록하기도 했고, 최대 100만 조회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뷰티 크리에이터 이사배와 협업한 라이브 콘텐츠엔 시청자 16만명이 몰렸다. 모델 김진경, 한현민 등과 함께 한 패션 라이브 방송에선 브랜드 노앙이 제품을 단독 론칭하면서 1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특급 호텔과도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조선팰리스와의 협업에선 롤스로이스로 픽업한 뒤 호텔에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부산 마티에 오시리아, 워커힐 더글라스, 몬드리안호텔 카바나스위트 등과도 협업했다. 올해 열렸던 '워터밤 서울 2022'이나 '힙합플레이야 페스티벌 2022' 같은 오프라인 행사에선 티켓을 판매했다. 워터밤에선 전용 부스도 설치했는데, 아이키와 레오제이 등 셀럽들이 이곳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RXC의 직원 수는 어느새 100여 명까지 불어났다. 이 중 40명 이상이 개발 인력이다. 내년 상반기까지 적극적인 채용에 나선다. 150명 수준까지 직원을 늘린다는 계획이다.
수익모델도 다져나갈 예정이다. 기존 커머스가 하던 검색·베너형 광고를 넘어 브랜드 그 자체를 광고할 수 있는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브랜드를 광고하는 건 일반적인 미디어가 했던 역할이다. 프리즘이 리테일미디어로 불리는 이유다. 또 플랫폼에 단독 입점하는 브랜드들이 늘어나면 이들의 지식재산권(IP)을 활용,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익 없이 덩치만 키우는 식의 성장 모델은 이미 힘을 잃었다는 게 유 대표의 판단이다.그는 "지금까지의 커머스 산업이 '플랫폼'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브랜드'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며 "소비자들이 특정 브랜드가 '이 곳에만 있구나'라는 인식을 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렇게 되면 플랫폼이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며 "10년 뒤엔 대중들의 뇌리에 프리즘 자체가 '힙스티지'의 상징처럼 각인되는 게 목표"라고 덧붙였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