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vs CJ제일제당 '10원 전쟁'의 진짜 이유 [박동휘의 컨슈머 리포트]

CJ제일제당과 쿠팡이 혈투를 벌이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 좀처럼 잡히지 않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원가 구조가 악화하는 등 파이가 작아진 상황에서 상품 제조(製)와 유통(販) 중 누가 좀 더 몫을 가져갈 것이냐가 분쟁의 내막이다. 좀 더 깊게, 멀리 조망한다면 각각 식품 제조와 e커머스 업계 국내 1위라는 점에서 양사의 전쟁은 한국 소비재 산업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 사건이다. 이 싸움이 왜 중요한지는 유럽과 미국의 제·판 힘의 균형이 어떤 지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대형 식품사 많은 미국 VS 유통이 강한 유럽

작년 말 매출을 기준으로 집계한 세계 100대 식품기업과 세계 100대 리테일러(유통업체)의 순위를 보면 미국과 유럽의 제판(製販) 지형은 정반대다. 우선 식품 기업 30위안에 유럽 기업은 5개뿐이다. 이 중 스위스 기업이 1위인 네슬레를 포함해 초콜릿 업체인 린트, 바리칼리바우트 등 3개 사다. 3위가 영국의 유니레버이긴 하지만, 식품보다는 ‘도브’ 등 생활용품에 특화된 기업이다. 프랑스 다농은 13위다.글로벌 식품업계를 주무르는 기업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나왔다. 맥도날드(2위), 몬델레즈(4위), ADM(5위), 크래프트 하인즈(8위), 치폴레 멕시칸 그릴(10위) 등 30위에 포진한 미국 식품회사는 17개에 달한다. 켈러그, 도미노 피자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의 기업이 수두룩하다.

유통업계는 사정이 좀 다르다. 글로벌 초강대국인 미국의 비중이 높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유럽 리테일러의 위세도 만만치 않다. 10위 안에 독일의 슈왈츠 그룹(4위)과 알디(8위)가 포진해 있다. 독일 국적의 글로벌 식품 기업이 전무하다시피 한 것과 대조적이다. 순위를 250개로 넓히면 독일 유통업체가 18개에 달하고, 테스코 등 영국 리테일러도 15개, 까르푸의 나라 프랑스도 14개가 100위권에 포함됐다. 독·프·영 3국의 숫자를 합하면 47개로 미국 70개에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

소비재 산업에 관한 한 유럽은 확실히 유통이 강한 나라다. 유럽 최대 공업국인 독일조차 식품 제조업에선 이렇다 할 대형 기업을 배출하지 못했다. 유럽연합(EU)이란 공동체 외양을 갖고 있지만, 국가별, 지역별로 로컬 소비가 워낙 강해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는 대형 식품회사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 주요 이유로 거론된다.

PB 비중이 80%인 초저가 할인슈퍼 알디의 공습

유통이 강한 유럽의 또 다른 현상은 소비자들이 PB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한국체인스토어협회 관계자는 “테스코, 세인즈베리, 아스다, 모리슨즈 등 영국계 유럽 대형 소매업체들의 PB(자체 브랜드) 비중이 40~50%에 달한다”며 “이것저것 끌어모아야 PB 비중이 20%에 채 못 미치는 한국은 물론이고, 전국구 브랜드(NB) 판매 비중이 훨씬 높은 미국의 유통업계와도 차이가 뚜렷하다”고 설명했다.

PB 판매 비중이 80%에 육박하는 알디의 약진은 유럽 내 제·판 힘의 균형이 어떤지를 짐작게 한다. 하드 디스카운트 스토어(HDS, 초저가 슈퍼마켓)라는 영역을 개척한 알디는 올해 11월 기준으로 모리슨을 제치고 영국 유통업계 점유율에서 4위에 올라섰다. 영국 유통업계에서 전통의 4강 구도가 깨진 것은 처음이다. ‘Discount ist die Kunst des Weglassens(할인은 곧 예술)’이란 구호 아래 테스코보다 평균 22% 싼 가격에 제품을 파는 알디의 전 세계 매출은 2020년 회계연도 기준 1170억달러에 달했다.

현재 유럽의 상황은 CJ제일제당을 비롯해 한국의 식품 기업에 최악의 시나리오다. 자칫 유통업체의 PB를 만드는 하청으로 전락할 수 있어서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시대를 앞선 투자로 글로벌 식품 경영, ‘한식의 세계화’를 천명한 바 있다. e커머스라는 신(新)유통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면 K푸드의 글로벌 시장 진출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CJ제일제당 입장에서 쿠팡은 기존 질서의 파괴자다. 이마트 등 기존 대형마트와는 공존할 수 있었다. 원가 구조의 변화에 따라 마진율을 서로 양보하고 조정하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이 신제품을 만들면, 이마트는 매대에 적극적으로 진열해줬다. 이마트가 노브랜드와 피코크라는 PB를 키우고는 있지만, 20%의 벽에 머물러 있는 것은 ‘능력 부족’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CJ제일제당, “K푸드 세계화 위해 힘 길러야” VS 쿠팡, “물가 방어가 지상과제”

글로벌 공급망 위기와 인플레이션 전쟁 이전만 해도 쿠팡과의 공존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식품업계 맏형격인 CJ제일제당은 햇반, 비비고 만두 등 자사 1등 브랜드를 쿠팡에 공급했다. 회사 측이 정보를 공개하고 있지만 않지만, CJ제일제당 주요 제품의 e커머스 판매 비중은 20~30%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농심이 신라면을 쿠팡에 아예 공급하지 않거나 공급하더라도 이마트보다 높은 가격에 납품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LG생활건강은 쿠팡과 소송전까지 불사했다.하지만 원가 구조 악화는 하루아침에 동지를 적으로 바꿔놨다. ‘소비자를 위한 물가 방어’를 내세우고 있는 쿠팡은 자고 나면 치솟는 상품 가격을 잡아야 했다. 쿠팡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기술을 동원해 자신들만의 ‘적정 가격’을 찾는데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다. 쿠팡의 잣대로 봤을 때 CJ제일제당은 마진율을 줄여야 했다. 이에 대해 CJ제일제당은 “흑자 기조를 유지해야 하는 쿠팡이 제조에만 일방 희생을 강요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꿈은 ‘한식의 세계화’와 글로벌 식품 기업으로의 성장이지만, 김범석 쿠팡 창업자는 첫째도 소비자, 둘째도 소비자를 부르짖는다. 쿠팡과 같은 대형 e커머스는 소비자에게 다른 어떤 채널보다 싼 가격(동일 상품이라면)에, 최상 품질의 상품(신선 등 그로서리)을 가장 빠르게(앞으로는 고객이 원하는 시간에) 배송해주는 것이 지상 최대 과제로 삼고 있다.

중국처럼 내수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거나, 미국의 아마존, 월마트처럼 세계 시장을 무대로 활약할 수 있으면 상관없겠지만, 쿠팡은 업력이 이제 갓 10년을 넘긴 한국의 ‘스타트업(이렇게 말하기엔 쿠팡의 덩치가 너무 큰 것은 사실이다)’이다. 대형 제조사의 NB 제품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스스로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유통은 PB 강화, 식품제조는 DTC가 ‘비장의 무기’

현재로선 양사가 타협점을 찾는 게 최선일 것이다. 쿠팡을 찾는 소비자가 햇반과 비비고 만두
를 구매할 수 없다면 이 또한 소비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CJ제일제당 역시 쿠팡과의 전쟁이 지속되면 매출 감소는 물론이고, 경쟁사들에 시장 점유율을 추격당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불확실성의 시대에 제조와 유통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든 똑같은 상황이 재현될 수 있는 만큼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는 무기를 미리 비축해두는 것이 상책이다. 쿠팡 등 유통업체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한방은 압도적인 품질의 PB다. 미국의 대형 소매업체인 크로거만 해도 PB 판매 비중을 늘리면서 올 3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7.3% 증가하는 등 깜짝 실적을 기록했다.

8%에 육박하는 물가 상승은 유통업체의 PB 전략에 훌륭한 자양분이다. 한국체인스토어협회가 광고 에이전시 NC솔루션의 조사를 인용해 작성한 콘텐츠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들은 동일 카테고리에서 보다 저렴하고 가성비 좋다고 생각하는 품목으로 교체(전체 응답자의 45%)하려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품을 구매할 때 제1의 기준이 가격이 됐다는 얘기다.CJ제일제당 등 제조사들은 압도적인 품질과 브랜드 파워를 가진 상품을 계속해서 내놓아야 하고, 이와 함께 DTC(다이렉트 투 컨슈머) 전략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e커머스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 온라인 공간에서 소비자와 직접 대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DTC 전략의 대가(大家)는 나이키다. 국내에선 유한킴벌리가 e커머스의 등에 올라타면서 동시에 DTC 채널을 키운 대표 사례로 꼽힌다. 진짜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