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공포의 시장'…주식 투자 외면하는 日 개미들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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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산시장의 그늘③일본의 증권가인 가야바초를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대부분 놀라움을 표한다. 세계 3대 경제대국 일본의 자본시장 중심가가 생각보다 초라해서다. 증권사 본사들이 몰려 있지만 여의도보다 훨씬 규모가 작다. 일본의 메가뱅크 본점들이 웅장한 것과 대조적이다.
개인투자가 '日 1400여만명 vs 韓 1374만명'
日증시 개인 비중 16.6%..50년새 '반토막'
버블붕괴 20년간 닛케이지수 1/5 '트라우마'
증시 시총 세계 1위서 5위로 추락
일본 증권가가 여의도보다 클 이유가 없기도 하다. 2021년 일본의 개인투자가 숫자는 1400여만명이고, 한국의 개인투자가는 1374만명이다. 일본의 인구는 우리나라의 2.5배지만 개인투자가의 숫자는 두 나라가 비슷하다.도쿄증권거래소에 따르면 2021년 일본의 개인투자가는 6460만명으로 1년 전보다 8% 늘었다. 8년 연속 개인투자가의 숫자가 늘면서 표면적으로는 한국 인구보다 많다. 단 도쿄증권거래소가 발표하는 개인투자가 숫자는 상장기업들이 공시하는 개인주주의 숫자를 단순 합산한 것이다.
1명의 개인투자가가 10개 종목에 투자했다면 도쿄증권거래소 통계에는 10명으로 반영된다는 뜻이다. 중복 계산된 숫자를 제외한 실제 개인주주의 숫자는 140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일본인 9명 가운데 1명이 주식투자자인 셈이다.한국 개미투자가들의 숫자가 일본과 맞먹게 된 것은 최근 일이다. 한국의 개인투자가 숫자는 지난 3년새 2.5배 늘었다. 한국인 4명 가운데 1명이 주식투자가다.한국과 반대로 일본은 개미투자가가 기록적으로 급감한 세계적으로 드문 나라다. 2021년 도쿄증권거래소가 상장사 주식을 누가 보유하고 있는지 조사했더니(주주분포조사) 개인 투자가들의 보유비율은 16.6%(금액 기준)로 50년 전에 비해 반토막났다. 주식 왕국 미국은 개인투자가들이 보유한 주식이 전체 상장사 시가총액의 40%에 달했다.1970년 무렵까지만 해도 일본 개인투자가의 주식 보유비율은 40%로 미국과 비슷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해체된 재벌과 일본 정부가 보유한 주식을 개인에게 양도하는 '증권 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영향이었다.
개인투자가들의 존재감이 옅어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 기업과 주거래 은행들이 주식을 상호보유하는 백기사 주식이 늘면서다. 외국계 자금으로부터 일본 기업의 경영권을 지킨다는 명목이었지만 버블(거품)경제 시대 남아도는 현금을 소진하기 위한 조치로도 비판받는다.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로 주가가 폭락한 것은 개인투자가들이 주식시장을 등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89년 12월29일 역대 최고치인 3만8915를 기록한 닛케이225지수는 1990년 한 해 동안 39% 떨어지며 2만3848까지 추락했다.
2008년에는 연간 기준 역대 최대폭인 42.1% 급락해 8859까지 떨어졌다. 2009년 3월10일 7054까지 추락하고서야 버블 붕괴로 폭락하기 시작한 닛케이지수는 바닥을 쳤다. 바닥을 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20년, 그 사이 지수는 5분의 1 토막 났다.
문자 그대로 날개없는 추락을 경험한 일본인들에게 '주가는 완만하게 오르는 우상향 곡선을 띈다'는 통념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주식시장은 자산이 종이조각으로 변하는 걸 경험하게 만든 트라우마일 뿐이다. 일본 정부가 20년째 '저축에서 투자로'를 외쳐도 일본인들이 주식시장을 외면하는 이유다.한때 미국을 넘어 세계 최대 주식시장(상장사 시가총액 기준)이었던 일본증시는 오늘날 중국과 유럽에 밀려 5위까지 처졌다. 일본 증시 추락사를 살펴보면 예금금리가 '제로(0)'인 나라의 국민들이 왜 이렇게 현금과 예금을 고집하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