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벤처투자 시장 전망…"혹한기에도 기회는 있다" [긱스]

올 한 해 벤처투자 시장의 키워드는 ‘혹한기’로 요약됩니다. 금리 인상으로 투자시장에 한파가 불어닥치면서 '제2의 벤처 붐’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국내 주요 벤처캐피털(VC)들은 내년에도 투자 혹한기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며 스타트업을 향해 ‘생존’에 초점을 맞출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또 시장 환경이 좋지 않을수록 플랫폼 비즈니스보다 ‘기술’을 가진 회사에 지갑을 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국내 4대 VC 대표들에게 내년에 주목할 산업 키워드를 한경 긱스(Geeks)가 물어봤습니다.

LB인베스트먼트와 IMM인베스트먼트는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반도체 등 테크분야를 내년 주목할 산업 키워드로 꼽았습니다. 다올인베스트먼트는 블록체인 인프라 기반의 웹3.0 스타트업을, KB인베스트먼트는 인공지능(AI)과 로봇 등을 내년 주요 투자 분야로 제시했습니다.
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가 21일 서울 대치동 본사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임대철 한경디지털랩 기자

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 "글로벌 시장에서 확장성 큰 테크 스타트업에 집중 투자"
△ 올해 역대 최대 규모 투자 집행..내년에도 '선택과 집중'
△ 스타트업, 韓 미래 핵심 경쟁력

“내년에는 올해보다 적극적으로 투자할 겁니다. 어려울 때 스타트업을 돕는 것이 벤처캐피털(VC)의 역할이죠. 반도체, 인공지능(AI), 무인 자동화 등 기술 기업을 발굴할 계획입니다”

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지난 21일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2000억원 이상을 투자해 한국의 미래를 이끌 유망 스타트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LB인베스트먼트는 그동안 엔터테인먼트업체 하이브, 게임사 펄어비스와 카카오게임즈, 프롭테크 업체 직방, 온라인 상거래 기업 컬리 등 한국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사)에 투자하며 국내 벤처케피털(VC)업계의 성장을 이끈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다. 박 대표는 2003년 투자 파트너로 LB인베스트먼트에 합류해 이 회사가 1조원 이상의 투자금을 운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올해 LB인베스트먼트는 연간 기준 역대 최대 규모로 투자를 집행했다. 올해 투자금은 2024억원으로 1년 전(1564억원)보다 29% 늘었다. 미술품 경매사 케이옥션에 300억원을 투자했다. 태블릿 기반 주문 플랫폼업체 티오더와 K팝 상거래 플랫폼 기업 케이타운포유에도 각각 100억원씩 투자했다. 스마트 기기용 디자인 소프트웨어 프로토파이를 개발한 스타트업 스튜디오씨드와 디지털 마케팅 통합 솔루션업체 아드리엘에는 50억원씩 투자했다. 박 대표는 “최근 투자 시장 위축에도 기술 기업 위주로 투자를 늘렸다”고 설명했다.

LB인베스트먼트는 내년에도 테크 기업 중심으로 투자 원칙을 지켜갈 계획이다. 박 대표는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여러 분야의 융합이 일어나는 곳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예정”이라며 “해외 시장에서 확정성이 높은 클라우드 기반 서비스형소프트웨어(SaaS) 기업도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핵심 기술을 보유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스타트업도 발굴해 투자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박 대표는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서 VC의 역할이 내년에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작년에 VC들이 조성한 펀드가 많아 올해 스타트업 업계에 자금 투입이 이어졌다”며 “하지만 내년에는 자금 공급이 줄어 올해보다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VC 업계에서는 내년에는 경쟁력이 있는 스타트업만 살아남는 ‘옥석 가리기’가 본격화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박 대표는 “투자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비가 올 때 우산을 씌워주는 것처럼 해당 업체가 돈이 필요할 때 투자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정부의 스타트업 정책에 대해서는 “스타트업 지원을 중소기업 육성, 일자리 창출 등의 목적보다는 한국 경제의 차세대 핵심 경쟁력을 육성하겠다는 목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 경제가 어려울 때 실리콘밸리 지역 스타트업의 역동성이 미국을 살린 것처럼 한국 스타트업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창규 다올인베스트먼트 대표가 21일 경기 성남 판교 본사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병언 기자

김창규 다올인베스트먼트 대표 "웹3.0 분야가 새 먹거리 될 것"
△보수적 입장서 올해 3000억 펀드레이징 성공
△1.5조 굴리는 VC로 발돋움...내년엔 싱가포르 등 본격 공략

다올인베스트먼트는 국내 1세대 벤처캐피털(VC)로 불린다. 1981년 문을 연 공기업 한국기술개발이 전신이다. 40년 넘는 업력을 쌓아 운용자산(AUM) 1조 5000억원을 굴리는 ‘톱 티어‘ VC로 성장했다.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비바리퍼블리카(토스), 몰로코 등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을 키워냈다.김창규 다올인베스트먼트 대표는 “3500억원 이상의 자금을 바탕으로 내년에는 웹3.0 등 블록체인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벤처시장 혹한기 속에서도 다올인베스트먼트는 올해 벤처 펀드 2개를 결성해 올해만 3000억원 이상 AUM을 늘렸다. 사명을 KTB네트워크에서 바꿔 단 뒤 모태펀드 정시 출자 사업에도 선정됐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투자를 늘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김 대표는 “올해는 시장 상황을 지켜보며 보수적인 입장에서 펀드레이징(모금)에 집중해왔다"며 "어려운 시기에 드라이파우더(미소진 자금)를 많이 확보해 둔 만큼 안정성 측면에서는 ‘톱 클래스’라고 자부한다"고 했다.

김 대표는 올해는 반도체 분야 스타트업들이 두각을 나타냈다고 평가했다. 그는 “공급망 이슈 탓에 그동안 소외됐던 팹리스 스타트업들이 주목받았다”며 “파두나 리벨리온, 퓨리오사AI 같은 좋은 스타트업들이 성장했다”고 말했다.

향후 떠오를 트렌드로는 웹3.0을 꼽았다. 그는 블록체인을 활용한 인프라 분야가 새 먹거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1990~2000년대에는 인터넷이 삶을 바꿔놨다면, 2010년대엔 스마트폰 기반 모바일 혁명이 있었다. 앞으로는 블록체인이 패러다임을 이끈다는 게 김 대표의 판단이다. 웹3.0 분야가 핀테크와 결합하면 제2의 비바리퍼블리카 같은 대형 스타트업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다올인베스트먼트는 최근 싱가포르 기반 웹3.0 전문 VC인 블록체인파운더스펀드에 출자자(LP)로 참여했다.

자율주행 등 모빌리티 분야에도 투자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다올인베스트먼트는 미국 증시에 상장한 에어택시 회사 조비에비에이션을 비롯해 호라이즌보틱스(중국 자율주행), 그랩(동남아시아 차량 공유업체), 포티투닷(한국 자율주행) 등에도 투자한 바 있다.

다올인베스트먼트는 내년에 해외 투자에도 더욱 열을 올릴 계획이다. 지난 8월 문을 연 싱가포르 사무소를 발판으로 인도네시아나 인도처럼 소비 시장이 탄탄한 아시아 시장 공략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김 대표는 스타트업들이 생존에 집중할 때라고 조언했다.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을 때 눈을 낮춰서라도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플랫폼 회사들이 수익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우후죽순 생겼던 포털 업체 중 지금 살아남은 곳은 네이버와 카카오 정도“라며 ”결국 1,2등 회사가 밸류에이션을 독식하는 현상이 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일부 IMM인베트스트먼트 대표(CIO)가 21일 서울 역삼동 본사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임대철 한경디지털랩 기자

정일부 IMM인베스트먼트 대표 "내년 벤처 투자 핵심 키워드는 수익 증명과 위기 관리"
△수익 날 수 있다는 것 증명해야...구조조정도 직원 합의 끌어내야
△내년 반도체 SaaS 등 기술기업에 주목
△MZ 선택 받은 플랫폼은 '생존'

“내년 유동성 축소 국면에서 스타트업이 살아남으려면 ‘수익 증명’과 ‘위기 관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정일부 IMM인베스트먼트 대표(최고투자책임자·CIO)는 “유동성의 힘으로 성장해온 플랫폼 기업은 수익을 증명해 내야하고 기술 기업도 연구·개발(R&D)을 수익성과 연계하지 않으면 투자받기 어려워질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정 대표는 “수익이 나는 스타트업에만 투자하는 건 아니지만 수익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야 한다”라며 “구체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없으면 투자받기 어렵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비용을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인력 문제에서도 위기관리 능력을 강조했다. 정 대표는 “구조 조정과 관련해 직원들과 합의를 잘 끌어내는 것도 경영자의 능력”이라며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 보상으로 직원과 상생 방안을 찾고 선제적으로 리스크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1999년 설립된 IMM인베스트먼트는 벤처펀드 운용자산(AUM)만 1조3766억원에 달하는 국내 최대 벤처캐피털(VC)로 꼽힌다. 최근 세계적인 금리 인상에 따른 유동성 축소 영향으로 이 회사의 내년 투자 규모는 2000억~2500억원으로 올해(2500억원)보다 비슷하거나 줄어들 전망이다. 내년 신규 펀드 조성 목표액도 2000억원으로 평년보다 낮게 잡았다.

정 대표는 앞으로 2~3년간 투자 가뭄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빌딩, 주식 등 자산 가격이 다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벤처 투자 업계도 눈높이를 낮춰야 할 것”이라면서도 “기업 가치 하락으로 창업자의 지분 가치가 과도하게 희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벤처 기업의 복수의결권 제도가 하루빨리 국회에서 통과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년 벤처 투자 가뭄기에도 기술 기업은 투자 기회가 있다는 게 정 대표의 생각이다. 그는 “기술 기업은 오랜 R&D 때문에 수익을 바로 만들어내긴 어렵지만, 인수·합병(M&A)을 통한 투자금 회수가 가능하다”며 “지난 8월 현대차가 자율주행 솔루션 기업 포티투닷을 인수한 것처럼 국내 성장성 있는 테크 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IMM인베스트먼트는 최근 투자한 반도체 극자외선(EUV) 장비 개발업체 이솔을 비롯해 퓨리오사AI, 리벨리온 등 AI 반도체 스타트업을 포트폴리오에 담고 있다. 정 대표는 “내년에는 반도체, 클라우드 솔루션, 로봇, 빅데이터 머신러닝, 스마트팜,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등 테크 기업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내 좋은 소프트웨어 인력이 많이 늘어난 덕분에 기업용(B2B) SaaS뿐만 아니라 소비자용(B2C) SaaS까지 새롭게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성장성에 ‘빨간불’이 켜진 플랫폼 스타트업과 관련해선 “MZ세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팬덤을 확보한 플랫폼은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남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장기적으로는 메타버스 분야의 성장성에 주목했다. 정 대표는 “내년 애플의 혼합현실(MR) 헤드셋이 출시되면 2007년 아이폰 출시 때처럼 큰 변화가 일 것”이라며 “가상과 현실 공간을 연결하는 다양한 콘텐츠 비즈니스가 생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종필 KB인베스트먼트 대표가 21일 서울 청담동 본사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대철 한경디지털랩 기자

김종필 KB인베스트먼트 대표 "R과 I의 공포 혼재…1兆 확보해 초기 스타트업 공략"
△올해는 펀드레이징에 주력...동남아·인도펀드 추가 결성
△CEO 직속 'KBFC'도 두각...하반기엔 규모 있는 성장기업에 투자

“‘R(Recession·경기 후퇴)’과 ‘I(Inflation·물가 상승)’의 싸움이 이어질 것입니다. 거시 경제 변동성에 덜 민감한 초기 기업을 다시 들여다볼 때입니다.”

김종필 KB인베스트먼트 대표는 21일 “다음 달이면 내년 투자를 위한 드라이파우더(펀드 미소진자금) 1조원을 확보하게 된다”며 “내년 상반기에 설립 2~3년 이하의 초기 기업에 선별적 투자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는 김 대표에게도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자산 가치 급등과 추락을 이렇게까지 급격히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면 내실을 다질 때”라고 생각했다. KB인베스트먼트가 올해 펀드레이징 작업에 주력했던 이유다. 결성이 끝난 ‘KB 스케일업 2호 펀드‘, 다음 달 만들어질 ’글로벌플랫폼펀드 2호‘만으로 각각 1800억원과 2500억원을 모았다. 드라이파우더는 내년 초 1조원을 목전에 두고 있다. 지난해 2조 4000억원 수준이었던 운용자산(AUM) 역시 같은 기간 2조 9000억원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지난해 목표였던 벤처캐피털(VC) 부문과 사모펀드(PE) 부문의 협업은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시장 자체가 어렵다 보니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기 어려웠다. 대신 역점에 두었던 조직이 KB파운더스클럽(KBFC)이다. 지난 4월 결성한 300억원 규모 펀드의 소진율이 이미 70%를 넘었다.

KBFC는 초기 스타트업 투자를 위해 연초 출범했다.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CEO 직속 조직으로 꾸렸다. 개발자 소셜 플랫폼 ’디스콰이엇‘ 등 40개 스타트업 투자가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김 대표는 “바이오·디지털 자산 테마가 침체했던 올해 투자 시장에서 정보기술(IT)을 매개로 한 초기 기업 투자가 잘 정착했다”고 강조했다. KBFC의 기여로 현재 KB인베스트먼트의 약 400개 포트폴리오 중 20% 이상이 초기 기업이 됐다.

2020년부터 본격화한 해외 투자는 현지 운용사와의 파트너십 강화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만든 첫 해외 공동GP(Co-GP) 펀드가 성공리에 운용되며 다음 달 1500억원 이상 규모의 2호 펀드를 조성할 예정이다. 인도네시아 국영통신사 텔콤그룹 계열의 MDI벤처스와 함께하고 있다. 내년에는 인도 현지 운용사와 700억원 상당의 신규 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예측이 어려운 1년이 더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른바 ’R의 공포‘와 ’I의 공포‘가 언제쯤 서로 간 우위를 점할지가 투자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상반기까진 저성장과 인플레이션의 문제 해결법이 충돌할 것으로 예상해 경기 민감성이 덜한 초기 기업 투자를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다만 하반기부터는 전략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인플레이션은 단기의 공포지만 저성장은 장기의 공포”라며 “결국 고금리에 익숙해지고 나면 규모가 있는 성장 기업에 합리적으로 투자를 할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허란/김주완/이시은/김종우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