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계묘년, 막말금지법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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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종교인들 거친 말에 실망20여 년 전 오대산 월정사에서 인허 스님(1916~2003)을 만났을 때였다. “허망한 소리 해봐야 구업(口業)만 짓는다”며 인터뷰를 사양하던 스님이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꺼낸 첫마디가 이랬다. “본래 근본은 말이 없는 거야. 유가에서도 도에 가까운 자는 말이 적다고 했어. 부처가 되려면 묵언정진해야 돼.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수구여병(守口如甁)하라. 입은 화가 들어오는 문이니 병마개 막듯 봉하라는 얘기야.”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
험한 말로는 공감 얻기 어려워
내년은 계묘년 토끼해
말 줄이고 귀 크게 열어 경청해야
서화동 논설위원
임인년(任寅年) 호랑이해가 1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구업을 지었는지 되볼아보게 된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거친 말, 경솔한 말, 막말로 화를 자초한 한 해였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연초부터 막말과 인신공격을 주고받으며 정치혐오를 부추겼다. 6·1 지방선거 땐 단일화에 실패한 서울교육감 보수 후보들이 서로를 ‘미친 X’ ‘상종 못할 XX’ ‘인간말종’이라고 비난했다. 퇴임한 문재인 대통령을 건드리면 “확 물어버리겠다”는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말은 귀를 의심케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빈곤포르노’ 시비, 대통령 전용기의 추락을 위해 기도한 천주교와 성공회 신부들은 또 어떤가. ‘인사 참사’ ‘외교 참사’ 등 툭하면 ‘~참사’ 꼬리표를 갖다 붙이는 민주당의 말폭탄도 거칠기는 매한가지다. 자신의 숱한 의혹은 덮어둔 채 상대를 ‘패륜정권’이라고 몰아붙이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자기가 전에 했던 말의 되갚음을 받고 있다.“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할 뿐 자기가 하는 말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한다.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잘못된 줄 알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으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조선 중기 문신 최유해(1588~1641)가 송나라 유학자 주희의 ‘경재잠(敬齋箴)’을 풀이하면서 강조한 말이다. 경재잠은 주희가 학생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글인데 인허 스님이 강조했던 ‘수구여병’이 여기에 나온다. 시대를 불문하고 말이 넘치는 게 사람살이인지라 언제나 말조심하라고 경계했던 것이다.
날마다 말의 홍수 속에 사는 현대인이 말실수나 실언을 완벽히 차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막말, 욕설, 비속어 같은 건 조심하면 저지르지 않을 잘못이다. 교수신문 설문조사에서 전국 대학교수들이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과이불개(過而不改)’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공자는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過而不改), 이를 잘못이라 한다(是謂過矣·시위과의)”고 했다.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過則勿憚改·과즉물탄개)”고 한 이유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거칠고 험한 말에 좋은 생각이 담길 수는 없다. 생각이 맑으면 말도 맑고, 생각이 거칠면 말도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사적인 대화까지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지만, 공인의 말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공직자와 정치인, 강단·교단·연단·무대 등에 오르는 이들, 대중매체와 SNS 등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의 막말은 그 결과가 당사자의 인격 훼손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개인의 말과 글을 다수가 본다는 점에서는 고질적인 악성 댓글도 마찬가지다.
아직 아픔과 충격이 가시지 않은 10·29참사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2차 가해성 막말과 비난부터 멈추자. “나라 구하다 죽었느냐” “자식 팔아 장사한다” “참사 영업” 같은 막말은 비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은 물론 자기 진영의 지지율마저 떨어뜨리는 하수(下手)요 악수(惡手)다. 유가족의 슬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온갖 음모론으로 갈등을 부추겼던 세월호 참사의 전례가 되풀이될까 걱정되지만 그걸 막말로 발화(發話)하는 순간 본뜻은 사라지고 다툼만 남게 된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성경 ‘잠언’)고 하지 않았던가.
내년은 계묘년(癸卯年) 토끼해다. 토끼는 가장 조용한 동물이다. 반려동물로 키워도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어지간해서는 소리를 내지 않아 성대가 없다는 오해를 살 정도다. 동화작가 정채봉이 쓴 ‘토끼의 비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목을 막은 대신 귀를 크게 열어주신 은혜를 이제야 깨닫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토끼는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는 대신 바람소리, 물소리 등 아름다운 숲의 소리를 마음껏 들으며 산다. 사람의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둘인 것도 덜 말하고 잘 들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지에 몰린다(多言數窮·다언삭궁)고 노자는 말했다. 경청하지 않고 지금처럼 아무 말이나 마구 내뱉는다면 ‘막말금지법’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