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1층에 서 있는 이 노인…세계서 가장 비싼 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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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아의 걷다가 예술백화점업계의 불문율 가운데 ‘1층에는 명품 화장품’이 있다. 백화점에 들어서는 순간 고급스러운 인상을 주면서도 가방이나 의류에 비해 저렴한 화장품으로 지갑을 일단 꺼내게 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데이비드 호크니 '2017년 12월, 스튜디오에서'
'팝아트의 거장' 호크니
포토그래픽 드로잉 기법으로
작업실을 360도 스캔하듯 촬영
사진 3000장 파노라마로 합성해
피카소 작품 같은 시공간 만들어
롯데백화점 동탄점은 공식과도 같은 판매 전략을 과감히 깨뜨렸다. 화장품 매장이 들어설 자리에 식품과 음료, 생활용품 매장을 넣었다. 무엇보다 예술작품을 곳곳에 배치했다. 유행을 선도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에서다. 미술품을 통해 ‘돈을 쓰는 공간’보다 ‘머물고 싶은 공간’이 되겠다는 노력이다.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1층 메인아트월에 있는 가로 7.6m, 세로 2.8m에 이르는 대형 작품이다. 작품 속엔 캔버스로 가득 찬 작업실 한가운데 줄무늬 카디건을 입은 한 노인이 서 있다. 바로 ‘팝아트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85)다.
호크니는 ‘수영장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수영장을 배경으로 한 ‘예술가의 초상’(1972) 덕분에 세계에서 그림값이 가장 비싼 생존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예술가의 초상’은 2018년 11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9030만달러(약 1020억원)에 낙찰됐다.
백화점에 걸린 호크니 작품의 배경은 작업실이다. 작품 제목은 ‘2017년 12월, 스튜디오에서’(2018).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할리우드힐스에 있는 호크니의 실제 작업실을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은 뒤 3000장을 골라 디지털로 합성했다. 작업실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실제 호크니의 작품들이다. 사진과 그림이 뒤섞여 있는 ‘포토그래픽 드로잉’ 작품인 셈이다.눈여겨볼 것은 왼쪽 벽면에 걸려 있는 그랜드캐니언 그림이다. 호크니가 자신에게 세계적 명망을 안겨준 ‘수영장 시리즈’를 포기하고, 1990년대 초반부터 그리기 시작한 시리즈다. 그는 그랜드캐니언의 장관을 사진으로 찍어 콜라주로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호크니가 ‘팝아트의 대가’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회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이미 30대부터 판화나 드로잉 등으로 전시를 열었고, 사진 콜라주 작품도 자주 선보였다. 특히 그는 여러 각도로 찍은 2차원의 평면 사진을 한데 모아 3차원 공간을 구현하는 작업을 즐겨했다. ‘2017년 12월, 스튜디오에서’도 마치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처럼 작업실 안의 사물과 작품에 따라 초점이 여러 가지다. “회화로는 담을 수 없는 시간의 연속성을 사진을 통해 보여줄 수 있다”는 게 호크니의 생각이었다.
이 작품은 전 세계에 12점밖에 없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작품을 확보하기 위해 6개월을 기다렸을 정도로 구매 경쟁이 치열했다”고 했다. 작품 앞에 전시된 책도 한정판이다. 세계적 아트북 출판사 타셴이 출간한 호크니의 한정판 도록이다. 호크니가 “내 작품세계가 이 한 권에 들어 있다”고 한 책이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