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무능과 타락을 그린 대담한 궁정화가[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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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상인의 딸인 이네스. 아름답고 우아한 분위기를 가진 그는 한 궁정화가의 모델이자 뮤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네스에게 큰 불행이 닥칩니다. 식당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교도라는 의혹을 받고 종교재판소에 가게 된거죠. 이네스는 억울하지만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거짓 자백을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네스의 사정을 알게 된 화가는 그를 돕기 위해 로렌조 신부를 소개해 줍니다. 하지만 로렌조는 이네스에 빠져 탐욕을 드러내고 맙니다. 급기야 이네스는 아이를 낳게 되고, 로렌조는 자신의 과오를 숨기기 위해 이 아이마저 해외로 추방시키려 하죠. 그리고 모든 것을 알게 된 화가는 분개합니다. 이 화가는 스페인 출신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입니다.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고야의 유령'(2008) 내용입니다. 영화는 궁정화가 출신이었음에도 끊임없이 사회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화폭에 담은 고야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이네스와 로렌조는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입니다. 감독은 두 사람을 바라보는 고야의 시선과 그림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타락을 부각시킵니다.
포먼 감독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아마데우스' 등을 만든 유명 감독입니다. 출연진도 화려합니다. '맘마미아!2' '듄' 등에 나온 스텔라 스카스가드가 고야 역을 맡았습니다. '블랙스완' '천일의 스캔들' 등에 나온 나탈리 포트만은 이네스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하비에르 바르뎀은 로렌조를 연기합니다. 고야는 영화에서처럼 잘나가는 궁정 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들을 주로 그렸죠.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대담하게 왕실의 타락과 교회의 광신주의를 비판한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궁정화가로 일하며 왕실을 풍자한 그림을 그렸다니 놀랍죠. 그가 54세에 그린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을 보실까요. 이 작품은 일반 왕실 초상화와는 다소 다릅니다. 미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죠.
작품에서 가슴에 훈장을 달고 있는 가운데 남성이 카를로스 4세입니다. 그는 무능했을 뿐 아니라, 나랏일보다 사냥을 하러 다니느라 바빴습니다. 고야는 왕의 뚱뚱하고 붉은 얼굴을 그대로 그렸습니다. 탐욕스러운 돼지처럼 표현한거죠.
왕의 왼쪽에 서서 공주와 왕자를 양손으로 잡고 있는 인물은 왕비 마리아 루이사입니다. 왕비 또한 무능했으며, 왕의 총애를 받는 고위 관료와 사랑에 빠져 있었죠. 고야는 이런 왕비 역시 우둔한 인물로 그렸습니다. 그는 이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그림에 그려넣었습니다. 왼쪽 뒤편에 있는 인물이 고야죠. 고야는 냉철한 시선으로 캔버스 밖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왕실의 타락과 부조리를 모두 간파하고 화폭에 담아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신기하게도 당시 왕실에선 이 그림을 보고도 고야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훗날 프랑스의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가 이 작품을 보고 "복권에 당첨된 걸 뽐내는 벼락부자처럼 보인다"라고 말했을 정도인데 말이죠.
영화 초반에 나오는 고야의 '로스 카프리초스' 연작 그림도 유명합니다. '변덕'이란 의미를 지닌 이 연작은 80여 점의 동판화로 구성돼 있습니다. 모두 교회와 성직자의 부패, 악습과 타락 등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잘 많이 알려진 그림은 43번째 판화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작품입니다. 이 제목은 연작의 부제가 되기도 했죠. 그림에선 잠들어 있는 남자의 등 뒤로 부엉이가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뒤엔 박쥐의 모습을 한 괴물이 날갯짓을 하고 있죠. 그리고 책상 앞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이성을 외면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 이로 인해 점점 커지는 야만성을 비판한 겁니다. 고야는 '1808년 5월 3일'을 비롯해 전쟁 등에 담긴 인간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고발하는 작품도 다수 그렸습니다. 하지만 귀가 안 들리는 증세가 악화되면서 점차 세상과 격리된 채 집에서 홀로 지냈습니다. 그곳에선 더욱 음울한 작품들을 그렸는데요.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가 대표적입니다.
고야가 77세에 완성한 이 그림은 아들에게 왕좌를 빼앗길까 봐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크로노스) 신을 그린 겁니다. 고야는 이 순간을 어둡고 섬뜩하게 표현해 잔혹성을 극대화했는데요. 그는 이를 통해 인간의 야만을 경고했습니다. 이 그림은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도 나와 화제가 됐습니다. 순양그룹 진양철 회장(이성민 분)의 장손 진성준(김남희 분)에게 그의 아내 모현민(박지현 분)이 그림을 소개하는 장면인데요. 성준의 아버지인 진양기(윤제문) 부회장이 성준을 배신하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인간의 부조리와 타락을 경계하고 화폭에 담아낸 화가 고야. 그의 그림들은 꾸준히 영화와 드라마에 활용되는 등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성이 잠들어 괴물이 깨어나는 일이 없도록.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어려움에 처한 이네스의 사정을 알게 된 화가는 그를 돕기 위해 로렌조 신부를 소개해 줍니다. 하지만 로렌조는 이네스에 빠져 탐욕을 드러내고 맙니다. 급기야 이네스는 아이를 낳게 되고, 로렌조는 자신의 과오를 숨기기 위해 이 아이마저 해외로 추방시키려 하죠. 그리고 모든 것을 알게 된 화가는 분개합니다. 이 화가는 스페인 출신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입니다.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고야의 유령'(2008) 내용입니다. 영화는 궁정화가 출신이었음에도 끊임없이 사회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화폭에 담은 고야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이네스와 로렌조는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입니다. 감독은 두 사람을 바라보는 고야의 시선과 그림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타락을 부각시킵니다.
포먼 감독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아마데우스' 등을 만든 유명 감독입니다. 출연진도 화려합니다. '맘마미아!2' '듄' 등에 나온 스텔라 스카스가드가 고야 역을 맡았습니다. '블랙스완' '천일의 스캔들' 등에 나온 나탈리 포트만은 이네스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하비에르 바르뎀은 로렌조를 연기합니다. 고야는 영화에서처럼 잘나가는 궁정 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들을 주로 그렸죠.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대담하게 왕실의 타락과 교회의 광신주의를 비판한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궁정화가로 일하며 왕실을 풍자한 그림을 그렸다니 놀랍죠. 그가 54세에 그린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을 보실까요. 이 작품은 일반 왕실 초상화와는 다소 다릅니다. 미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죠.
작품에서 가슴에 훈장을 달고 있는 가운데 남성이 카를로스 4세입니다. 그는 무능했을 뿐 아니라, 나랏일보다 사냥을 하러 다니느라 바빴습니다. 고야는 왕의 뚱뚱하고 붉은 얼굴을 그대로 그렸습니다. 탐욕스러운 돼지처럼 표현한거죠.
왕의 왼쪽에 서서 공주와 왕자를 양손으로 잡고 있는 인물은 왕비 마리아 루이사입니다. 왕비 또한 무능했으며, 왕의 총애를 받는 고위 관료와 사랑에 빠져 있었죠. 고야는 이런 왕비 역시 우둔한 인물로 그렸습니다. 그는 이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그림에 그려넣었습니다. 왼쪽 뒤편에 있는 인물이 고야죠. 고야는 냉철한 시선으로 캔버스 밖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왕실의 타락과 부조리를 모두 간파하고 화폭에 담아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신기하게도 당시 왕실에선 이 그림을 보고도 고야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훗날 프랑스의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가 이 작품을 보고 "복권에 당첨된 걸 뽐내는 벼락부자처럼 보인다"라고 말했을 정도인데 말이죠.
영화 초반에 나오는 고야의 '로스 카프리초스' 연작 그림도 유명합니다. '변덕'이란 의미를 지닌 이 연작은 80여 점의 동판화로 구성돼 있습니다. 모두 교회와 성직자의 부패, 악습과 타락 등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잘 많이 알려진 그림은 43번째 판화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작품입니다. 이 제목은 연작의 부제가 되기도 했죠. 그림에선 잠들어 있는 남자의 등 뒤로 부엉이가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뒤엔 박쥐의 모습을 한 괴물이 날갯짓을 하고 있죠. 그리고 책상 앞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이성을 외면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 이로 인해 점점 커지는 야만성을 비판한 겁니다. 고야는 '1808년 5월 3일'을 비롯해 전쟁 등에 담긴 인간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고발하는 작품도 다수 그렸습니다. 하지만 귀가 안 들리는 증세가 악화되면서 점차 세상과 격리된 채 집에서 홀로 지냈습니다. 그곳에선 더욱 음울한 작품들을 그렸는데요.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가 대표적입니다.
고야가 77세에 완성한 이 그림은 아들에게 왕좌를 빼앗길까 봐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크로노스) 신을 그린 겁니다. 고야는 이 순간을 어둡고 섬뜩하게 표현해 잔혹성을 극대화했는데요. 그는 이를 통해 인간의 야만을 경고했습니다. 이 그림은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도 나와 화제가 됐습니다. 순양그룹 진양철 회장(이성민 분)의 장손 진성준(김남희 분)에게 그의 아내 모현민(박지현 분)이 그림을 소개하는 장면인데요. 성준의 아버지인 진양기(윤제문) 부회장이 성준을 배신하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인간의 부조리와 타락을 경계하고 화폭에 담아낸 화가 고야. 그의 그림들은 꾸준히 영화와 드라마에 활용되는 등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성이 잠들어 괴물이 깨어나는 일이 없도록.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