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일루미나에 5000억원대 벌금 부과할 듯 [이우상의 글로벌워치]

그레일 인수 강행에 유럽 매출 10% 벌금 우려
일루미나의 최신 유전자분석장비 '노바섹 6000(NovaSeq 6000)'. 자료 일루미나
세계 유전자 분석기기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일루미나가 유럽 매출의 10%를 벌금으로 내야 할 위기에 처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반독점에 관한 조사 및 판단 결과가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그레일 인수합병을 먼저 종료한 것이 문제가 됐다.

11일(미국 시간) 로이터는 EU 집행위원회와 반독점 금지법 문제에 정통한 전문가들을 인용해 일루미나가 유럽 매출 10%를 벌금으로 부과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일루미나는 이에 대비해 4억5300만달러(약 5600억원)를 준비해 둔 상태다.그레일은 2016년 일루미나에서 분사한 진단 전문 기업이다. 2020년 일루미나는 사업 효율화를 위해 그레일 인수합병을 발표했다. 암 진단에 필요한 유전자검사를 더 저렴하면서도 정확하게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인수 목적을 밝혔다. 이후 EU 집행위원회와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독점금지법 저촉 문제로 일루미나를 제소했다. 그러나 일루미나는 그레일 인수합병을 강행해 지난해 8월 절차를 마무리했다.

미국에서는 독점 문제가 해소된 상태다. 작년 9월 미국 행정법원이 일루미나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같은 달 EU 집행위원회는 일루미나의 그레일 합병을 불허하며, 분리된 채로 있을 것을 요구했다.이번에 일루미나에 부과될 것으로 예상되는 벌금은 EU 집행위원회의 판단이 나오기 한 달 앞서 일루미나가 그레일 합병을 임의로 완료한 것에 대한 것이다.

EU 집행위원회와 FTC가 일루미나의 그레일 인수에 대해 독점이라 판단한 근거는 유전자 분석기기 시장에서 일루미나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 때문이다. 일루미나는 사실상 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유럽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90%를 웃돈다. EU 집행위원회와 FTC는 일루미나가 신제품 및 신기술을 자회사인 그레일에만 몰아줘 다른 기업들이 도태되거나 고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업계는 벌금이 몇 달 안에 일루미나에 부과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루미나는 이에 항소한다는 계획이다. 그레일 인수합병을 무효화하고 다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라는 EU 측의 명령에 대해서도 이의제기를 한 상태다.

일루미나의 주가는 2021년 고점을 찍은 뒤(2021년 8월 13일 517.32달러) 하락세다. 현재 204.05달러다. 헬스케어 관련주가 전반적으로 하락하긴 했지만, 일루미나의 성장세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도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3분기 누적 기준 일루미나의 매출은 전년 대비 4.7% 증가한 30억3900만달러였다. 2021년 일루미나 매출은 전년 대비 45.1% 늘었다. 이에 비해 매출 성장세가 크게 꺾였다. 순이익은 적자로 돌아섰다. 42억6500만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그레일의 영업손실 41억달러가 반영됐다.일루미나는 2022년 3분기 실적발표회에서 그레일이 혈액을 통해 여러 종류의 암을 동시에 진단하는 ‘갈레리(Galleri)’ 등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유전자 분석기기 판매 증가 및 소모품 판매로 일루미나가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거시경제 등을 이유로 2023년 성장 목표치는 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