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거 피해 5조, 배상은 5억…노란봉투법 시행땐 그마저도 '면죄부'
입력
수정
지면A4
시군구 청사 점거 제외해도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하이트진로 노조는 작년 8월 서울 청담동 하이트진로 본사에서 25일간 불법 점거 농성을 벌였다.
지난 5년간 25건 '무법천지'
사무실 집기 때려부수고
음주·노래자랑에도 속수무책
파업 해제땐 책임도 안물어
경찰 '노사문제'라며 수수방관
"노란봉투법 국회 통과되면
기업 방어장치 사라지게 돼"
건물에 인화 물질인 시너까지 반입하는 등 아찔한 위협 끝에 200여억원의 손실을 입혔다. 그럼에도 노조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점거를 푸는 과정에서 사측이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법 점거가 끝나지 않는다”고 했다. 경찰 역시 지난달 말 파업 관련자를 모두 불구속 송치했다.
대한민국 일상이 된 불법 점거
한국 사회에서 노조와 시위대의 불법 점거는 이미 도를 넘었지만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엄정 대응 방침에도 실제 법 집행 과정에서 경찰 등 공권력과 기업들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과거 관행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본지가 지난 5년(2018~2022년)간 한국 기업과 공공기관 점거 및 파업 사례를 전수 조사한 결과 총 점거 파업 횟수는 총 25건이었다. 이마저도 지난달 5건, 지난 5년간 수백 건 벌어진 소규모 시·군·구 청사 점거 등은 뺀 수치다. 점거 파업이 길게는 두세 달 이상 지속되는 점을 감안하면 매달 전국 어딘가에선 점거 농성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점거 대상도 다양하다. 작년에만 현대제철과 쿠팡, 대우조선해양, CJ대한통운 등의 대형 민간 사업장이 점거됐다. 지난해 2월 민주노총 전국택배노조는 CJ대한통운 본사를 점거하고 음주, 흡연, 노래자랑 등을 벌였다. 노조가 작년 5월부터 두 달 동안 사장실에서 숙식 농성에 나선 현대제철은 12월 말에서야 노사 합의를 끝냈다. 점거 참여 인원만 2463명에 달했지만 구속된 노조원은 한 명도 없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에서 노조의 불법 행위를 사실상 눈감아준 탓”이라고 비판했다. 경찰 측은 점거 파업은 아니지만 지난해 말부터 화물연대와 건설노조 파업 관련 구속 수사가 늘고 있다고 답했다.구속 수사 없이 형사 재판을 통해 징역형을 산 노조원은 8명, 벌금을 낸 노조원은 16명이었다. 경기 광명의 한 건설업체 간부는 “노조원들이 사무실을 점거하고 망치로 TV 등을 때려 부숴 증거를 경찰에 제출했지만 구속은커녕 노조의 미움만 더 샀다”며 “경찰로부터 ‘노사가 알아서 합의할 문제’라는 대답만 내놨을 땐 절망감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손해배상 청구 역시 꿈도 꾸지 못한다. 하이트진로는 아예 손해배상 청구를 안 하기로 노조와 약속했다. SPC와 한진택배, 한국수력원자력, 울산시청 등 역시 노조의 불법 점거에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않았다.
“원칙 입각한 공권력 대응 절실”
불법 점거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상당하다. 지난 5년 동안 사업장 점거 파업으로 인한 피해액은 4조9760억원에 달했다. 점거 파업으로 분류하진 않았지만 작년 두 차례의 화물연대 파업 피해(5조7000억원)를 합치면 10조원을 훌쩍 넘어선다. 현대자동차는 2018년 1월 끝난 점거 파업으로 1조7100억원의 손실을 봤다. 르노자동차 역시 2018~2019년 네 차례 파업에서 8150억원,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도크 점거 파업으로 8000억원의 피해를 봤다.전문가들은 노조의 불법 행위에 더 강력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사 문제는 이해 관계가 복잡해 공권력이 정치적, 정책적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일수록 원칙에 따른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업계에선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도입 시 노조의 불법 점거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노란봉투법은 노조의 불법 파업으로 발생한 손실에 대해 사측의 손해배상을 제한하는 법안이다.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 장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노란봉투법은 기업 입장에서 헌법상 기본권인 재산권을 침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김우섭/원종환/구교범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