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씨에게 서재 만들어줬을 때가 가장 행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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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장관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이 쓴 '글로 지은 집'
"세상에 나서 내가 가장 기뻤던 때는 그에게 원하는 서재를 만들어주던 1974년이었다. "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부인 강인숙(90) 영인문학관장은 최근 출간된 에세이 '글로 지은 집'(열림원)에서 이렇게 옛일을 회고했다.
2015년 이어령 전 장관은 대장암에 걸렸다.
생명의 시한(時限)이 생기자 조급해졌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끝내지 못한 글이 많았던 탓이다.
그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혼자 글을 쓸 수 있는 고독한 시간을 갈망했다.
남편이 책 쓰기에 몰두하자 아내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대학 동기동창으로 남편과 동갑인 강 관장도 삶을 정리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도 책을 쓰기 시작했다.
구순이 되어가던 부부가, 아내는 아래층에서 '집 이야기'를 쓰고, 남편은 위층에서 '한국인 이야기'를 썼다. '글로 지은 집'은 아내가 쓴 그 결과물이다.
부부가 단칸방을 전전하며 애들을 키우고, 글을 쓰며 지인들과 정을 나누고, 마침내 자신의 집과 영인문학관을 짓기까지의 긴 여정을 담았다.
"한 여자가 새로운 가족과 만나 동화되는 과정의 이야기고, 한 신부가 단칸방에서 시작해 나만의 방이 있는 집에 다다르는 이야기"이다.
책은 이어령 부부가 십 육 년 동안 거쳐 간 여덟 곳의 집 이야기로 이뤄졌다.
성북동 골짜기 단칸방, 어항 속 붕어들까지 얼어붙은 냉골이었던 삼선교 북향 방,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를 목도한 청파동과 한강로의 집, 박경리·선우휘·김지하 등과 교류하던 성북동 언덕 위 이층집, 부부에게 마지막 쉼터가 되어 준 평창동 집 등을 조명한다. 강 관장은 집을 소재로 했지만 실제로는 그 집에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전한다.
집에서 부부는 먹고살면서 애를 낳아 키우고,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책에는 살면서 겪었던 희로애락과 세월에 따라 변해가는 감정의 결이 고스란히 담겼다.
"가난 같은 것은 거뜬히 견뎌낼 자신이 있었던" 20대의 패기, 첫 보너스를 받았을 때의 황홀함, 5.16 당시 야밤에 들었던 총소리에 커져만 가는 아이와 남편에 대한 걱정,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겪었던 힘겨움, 대학 교수 사회에서 흔했던 여성 차별, 그리고 부부 곁을 하나둘 떠나간 가족들과 지인들의 이야기 등 삶의 희로애락이 지면에 배어 있다.
사별한 남편을 묘사하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이 전 장관은 예술가적인 자질이 있어 "신경이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사람이었지만 사람을 좋아해 대접하길 즐겼고, "누군가와 지적인 담화를 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글은 혼자 쓰는 것이고,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았기에 남편은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 장관이 남긴 책의 부피는 고독의 부피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의 종착점은 영인문학관 건립이다.
부부는 "두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커진 그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문학관을 지을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평생 글을 쓰고 강의하며 번 돈을 문학관을 짓는 데 썼다.
영인문학관은 부부가 '글로 지은 집'이었던 셈이다.
작업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건축비가 모자라 인테리어에 쓸 비용이 없었다.
부족한 돈은 은행 대출로 채웠다.
문학관을 짓는 도중 외손자가 미국서 사망하기도 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우는 것과 주판 튀기는 일이 유착된, 끔찍하고 괴이한 소용돌이" 속에 몇 달간 이를 악물고 헤맸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현실은 슬프다고 봐주는 법이 없다.
빅토르 위고의 말대로 '오늘의 과제는 싸우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면 곧 그 싸움터로 돌아가야 한다.
" 1974년에 평창동에 집을 지은 후 부부는 다시는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깊은 산속 같은 '기적적인' 동네 평창동을 부부는 사랑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문학을 생각하는 장소를 마련하게 해 준 것은 특별한 축복이었다.
"신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이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평창동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우니 어느 철에 가도 무방하지만, 이왕이면 송홧가루가 시폰(chiffon) 숄처럼 공중에서 하느작거리는 계절이면 좋겠다. "
392쪽. /연합뉴스
"세상에 나서 내가 가장 기뻤던 때는 그에게 원하는 서재를 만들어주던 1974년이었다. "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부인 강인숙(90) 영인문학관장은 최근 출간된 에세이 '글로 지은 집'(열림원)에서 이렇게 옛일을 회고했다.
2015년 이어령 전 장관은 대장암에 걸렸다.
생명의 시한(時限)이 생기자 조급해졌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끝내지 못한 글이 많았던 탓이다.
그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혼자 글을 쓸 수 있는 고독한 시간을 갈망했다.
남편이 책 쓰기에 몰두하자 아내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대학 동기동창으로 남편과 동갑인 강 관장도 삶을 정리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도 책을 쓰기 시작했다.
구순이 되어가던 부부가, 아내는 아래층에서 '집 이야기'를 쓰고, 남편은 위층에서 '한국인 이야기'를 썼다. '글로 지은 집'은 아내가 쓴 그 결과물이다.
부부가 단칸방을 전전하며 애들을 키우고, 글을 쓰며 지인들과 정을 나누고, 마침내 자신의 집과 영인문학관을 짓기까지의 긴 여정을 담았다.
"한 여자가 새로운 가족과 만나 동화되는 과정의 이야기고, 한 신부가 단칸방에서 시작해 나만의 방이 있는 집에 다다르는 이야기"이다.
책은 이어령 부부가 십 육 년 동안 거쳐 간 여덟 곳의 집 이야기로 이뤄졌다.
성북동 골짜기 단칸방, 어항 속 붕어들까지 얼어붙은 냉골이었던 삼선교 북향 방,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를 목도한 청파동과 한강로의 집, 박경리·선우휘·김지하 등과 교류하던 성북동 언덕 위 이층집, 부부에게 마지막 쉼터가 되어 준 평창동 집 등을 조명한다. 강 관장은 집을 소재로 했지만 실제로는 그 집에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전한다.
집에서 부부는 먹고살면서 애를 낳아 키우고,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책에는 살면서 겪었던 희로애락과 세월에 따라 변해가는 감정의 결이 고스란히 담겼다.
"가난 같은 것은 거뜬히 견뎌낼 자신이 있었던" 20대의 패기, 첫 보너스를 받았을 때의 황홀함, 5.16 당시 야밤에 들었던 총소리에 커져만 가는 아이와 남편에 대한 걱정,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겪었던 힘겨움, 대학 교수 사회에서 흔했던 여성 차별, 그리고 부부 곁을 하나둘 떠나간 가족들과 지인들의 이야기 등 삶의 희로애락이 지면에 배어 있다.
사별한 남편을 묘사하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이 전 장관은 예술가적인 자질이 있어 "신경이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사람이었지만 사람을 좋아해 대접하길 즐겼고, "누군가와 지적인 담화를 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글은 혼자 쓰는 것이고,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았기에 남편은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 장관이 남긴 책의 부피는 고독의 부피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의 종착점은 영인문학관 건립이다.
부부는 "두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커진 그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문학관을 지을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평생 글을 쓰고 강의하며 번 돈을 문학관을 짓는 데 썼다.
영인문학관은 부부가 '글로 지은 집'이었던 셈이다.
작업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건축비가 모자라 인테리어에 쓸 비용이 없었다.
부족한 돈은 은행 대출로 채웠다.
문학관을 짓는 도중 외손자가 미국서 사망하기도 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우는 것과 주판 튀기는 일이 유착된, 끔찍하고 괴이한 소용돌이" 속에 몇 달간 이를 악물고 헤맸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현실은 슬프다고 봐주는 법이 없다.
빅토르 위고의 말대로 '오늘의 과제는 싸우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면 곧 그 싸움터로 돌아가야 한다.
" 1974년에 평창동에 집을 지은 후 부부는 다시는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깊은 산속 같은 '기적적인' 동네 평창동을 부부는 사랑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문학을 생각하는 장소를 마련하게 해 준 것은 특별한 축복이었다.
"신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이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평창동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우니 어느 철에 가도 무방하지만, 이왕이면 송홧가루가 시폰(chiffon) 숄처럼 공중에서 하느작거리는 계절이면 좋겠다. "
392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