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 덮친 구룡마을…"설날 쓸 제수용품까지 다 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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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성 합판 등에 불길 빨리 번져“겨우 살았지만 아무것도 못 갖고 나왔어요.”
주택 60가구 소실·이재민 62명
골목 곳곳 LPG통 방치 '아찔'
"소화기 얼어붙어…초기 진압 못해"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0일 오전 9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검은 연기로 가득 찬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마을 곳곳에는 설 연휴를 위해 쟁여놓은 연탄 수백 개가 성인 키 높이만큼 쌓여 있었다. 소방관이 불길을 진압하고 있는 현장에서는 골목에 방치된 연탄과 LPG(액화석유가스)통 때문에 아찔한 상황이 잇따랐다. 마을 주민들은 점퍼 하나만 걸친 채 빈손으로 뛰쳐나와 임시대피시설로 이동했다.구룡마을에서 큰불이 났다. 불은 5시간가량 이어져 주택 60가구가 소실되고 이재민 62명이 발생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비닐과 합판 등 가연성 물질로 집을 지은 판자촌 특성상 불길을 잡긴 쉽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설날을 앞두고 황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구룡마을에 20년 넘게 거주했다는 조모씨(69)는 “설 차례상을 차리기 위해 장을 봐뒀는데 아무것도 못 하게 됐다”며 “소화기를 쓰려고 했지만 전부 얼어 있어서 쓸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골목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가스통과 연탄 탓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주민도 있었다. 마을주민 김모씨(76)는 급박한 상황 때문에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했다. 그는 “아침부터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서 나와보니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며 “집 근처에 있던 LPG 가스통이 터졌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불은 이날 오전 6시27분께 구룡마을 4지구에서 발생해 주변으로 확대된 것으로 알려졌다. 소방당국은 오전 7시26분 대응 2단계를 발령했다. 인근 소방서 인력과 경기도·산림청 등 소속 소방헬기 10대를 투입했다. 오전 9시16분에는 연소 확대가 감소함에 따라 대응 1단계로 하향 발령했다. 이후 오전 11시46분이 돼서야 불은 완전히 진압됐다. 당국은 구룡마을 2700㎡가 소실되고 44가구에서 이재민 62명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했다. 소방·경찰 인력 517명과 장비 68대, 강남구청 소속 인력 300명이 동원됐다.
소방 관계자는 “가연성 합판 때문에 불길이 빠르게 번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연성 합판은 이른바 ‘떡솜’으로 불리는 단열재로 불에 잘 타는 건축 자재다.
전문가들은 신속한 피난과 초기 진화를 도와주는 주택용 소방시설인 단독경보형 감지기와 가정용 소화기를 적극적으로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단독 경보형 감지기는 일반 화재경보기처럼 배선을 따로 설치할 필요가 없어 곳곳에 설치할 수 있다”며 “구룡마을처럼 어르신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일반 소화기뿐만 아니라 가벼운 에어로졸식 소화기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재민들은 거주지가 정해질 때까지 강남구에 있는 3성급 호텔 네 곳에 임시로 이동해 머물 계획이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