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현역' 이순재 "기성세대가 젊은이들 앞길 방해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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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앞둔 나이에 연극 '갈매기' 연출해 후배들과 함께 출연
"세계 일류 만들어내는 요즘 젊은이들…기성세대가 꿈 오염시키지 말아야"
드라마·연극·영화로 올해도 분주…"건강 비결? 그런 거 없고, 그냥 할 일 할 뿐" 아흔을 바라보는 '국민 배우' 이순재(88)의 빠르고 거침없는 말에서는 팽팽한 탄력이 느껴졌다. 90년대 초반 국민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나 2000년대 인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보여줬던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 그대로인 듯했다.
작년에 러닝타임 세 시간이 넘어가는 셰익스피어의 대작 '리어왕'에서 주역 리어왕을 열연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던 그는 이번에는 연출자로 나서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후배 배우들과 함께 대극장 무대에 올리고 있다.
연출과 함께 배역까지 맡아 김수로, 소유진, 이항나, 강성진 등 후배 배우들과 직접 무대에도 선다. 특별한 건강관리법도 없고 그저 매일 아침 일어나면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어 열심히 할 뿐이라는 이 '영원한 현역 배우'를 설을 앞두고 지난 10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났다.
한 시간 반 남짓 이어진 대화에서 이순재는 한국을 비롯해 영국과 러시아 등 유럽의 극예술과 영화, 역사 전반을 넘나들었다.
여전히 지적인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의 눈빛은 과거 그가 출연했던 예능 프로 '꽃보다 할배'에서 부지런히 해외 여행지를 돌아다니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연기를 업으로 삼은 후배들에겐 외모만 출중한 '모델 스타'에 그치지 말고 끊임없는 공부와 단련을 통해 진정한 배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젊은이들에게서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본다는 그는 기성세대가 후배들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고 뒤에서 그저 묵묵히 밀어줘야 한다는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 지금 공연하는 '갈매기'는 어떤 작품인가요. ▲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의 대문호니까 더 덧붙일 얘기가 없지만, 이 작품은 그 안에 철학과 심오한 사상성을 갖고 있어요.
배경이 제정 러시아 말기인데 젊은이들은 암울한 미래에 절망하는 등 사회적으로 최악의 시기였죠. 당대 지성인 체호프가 '이건 안 되겠다, 뜯어고치지 않으면 민중과 서민들이 살 수가 없겠다' 하고 뼈저리게 느껴 체제 개혁에 대한 생각을 이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한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을 통해 어떤 시대정신을 보여준 것이죠. 두고두고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작품이에요.
원전에서 대사 한 마디라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원작 그대로 해보자 했지요.
제대로 된 후배 배우들과 함께 언젠가 꼭 해봤으면 했는데, 이렇게 무대에 올리게 됐습니다. -- 이 작품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뭘까요.
▲ 체호프가 이 작품을 쓸 때와 지금 우리 상황은 차이가 있죠. 그래도 청년 취업난이나 기성세대와의 충돌 등은 늘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갈매기'는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꿈,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꾼 청년들이 결국 기성세대의 억압과 욕심으로 좌절된다는 얘기거든요.
제가 늘 하는 얘기가 기성세대가 우리 젊은이들의 꿈을 오염시키지 말자는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 신체, 용모, 두뇌 모두 우리와는 전혀 달라요.
세계 일류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대중문화도 세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잠재된 역량이 발휘되고 있어요.
이런 젊은이들의 힘을 계속 발전시키고, 꿈을 실현할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주는 게 기성세대의 책임이에요.
-- 지금과 같은 '한류'를 젊은 시절에 예상하셨나요.
▲ 아휴, 예상 못 했죠. 공연 분야는 역사적으로도 우리가 후발 주자입니다.
영국엔 셰익스피어가 있었고, 고대 그리스 비극들부터 시작해서 유럽이 이쪽의 문화적 원류죠. 일본엔 가부키가, 중국엔 경극이 있었고요.
불행히도 우리는 한일합방 후 일본에서 들어오면서 공연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어요.
그 유명한 '이수일과 심순애'도 우리 작품이 아니고 일본 것을 번안했잖아요.
영화도 우리 60~70년대에 유현목·이만희·김수용·신상옥 등 좋은 감독들이 많았지만, 당시 '아휴 우리가 뭘…' 하면서 스스로 위축이 많이 됐었어요.
영화 제작자들도 국내시장에만 집중하고 영화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던 시대였지요.
사회에서는 우리를 '딴따라'라며 무시하는 시선도 많았고요.
세계를 바라보며 진취적으로 도전하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래도 임권택 감독 등 계속해서 훌륭한 감독들이 배출되긴 했지만… 그 당시에도 좀 더 과감히 자신을 갖고 세계무대에 도전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젠 한류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고, 누구든지 한번 도전해 볼 수 있게 됐잖아요?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 후배들이 충분한 역량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그럼요.
옛날 같으면 석 달을 무대에서 연습해야 겨우 되던 게 요즘 친구들은 한 달이면 충분해요.
옛날에 우리는 머리도 나빠서 잘 안 됐어. 내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에서 석좌교수로도 있는데, 학생들과 연극 수업을 해보면 이건 뭐 전혀 손색이 없어. 선생이 지도하기에 달린 거지 학생들은 아주 잘 따라온단 말이에요.
지금도 보세요.
진지희 같은 우리 젊은 친구들 무대에서 얼마나 잘합니까.
-- 그래도 후배들 연기에 아쉬움 같은 건 좀 있으시죠?
▲ 배우들이 너무 빨리 어떤 수준에 도달해 버리면 안주해 버리기가 쉬워요.
그게 다라고 생각해선 안 돼요.
한 단계 뚫고 더 올라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어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극복해야 합니다.
내가 소위 '스타'들과 작업하다 보면 좀 아쉬운 게 있을 때가 있어요.
돈도 많이 벌고 누가 봐도 스타가 됐지만, 옆에서 보면 '어, 이 친구가 조금만 더 보완하면 훨씬 더 좋은 배우가 될 텐데' 하는 게 있어요.
한 번은 내가 한 친구와 작품을 같이 하면서 "이거 끝나면 뭐 하냐"고 물었더니 그냥 말없이 웃더라고. 그래서 "돈은 많이 벌었지? 그런데 지금 그대는 '모델 스타'야. 쉬면서 미국에 건너가 '액터스 스튜디오' 같은 프로 연기 학교에 가서 연기도 다듬고 영어 공부도 하고 오면 좋잖아? 그런 노력을 하면 비로소 '모델 스타'에서 '액팅 스타'가 될 수 있어. 금상첨화지."라고 얘기해준 적이 있어요.
여기서 말한 '모델 스타'는 연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지는 못한 스타에요.
만날 깔끔하게 멋 내는 게 배우가 아니라 역할을 위해 항상 변신하는 게 배우지요.
자기의 연기 행위에 대해 스스로 판단을 못 하는 배우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내가 연기경력 60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주변에 떴다가 사라진 배우들이 수백 명이에요.
자기 단련을 멈추지 않아야 오래 가는 배우가 돼요.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 다 똑똑해서 이런 걸 잘 알고 있어요. -- 연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시는 후배 배우들은 누가 있을까요.
▲ 스타들 중에도 연기를 예술적 경지로 끌고 간 배우들이 있죠. 송강호, 최민식 같은… 이 친구들은 배우이자 장인들이에요.
송강호는 영화 '밀양'을 보고 '이 친구 정말 좋은 배우구나' 하고 느꼈어요.
극 중에서 자기 역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딱딱 절제하는 연기가 참 좋더라고. 또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하면서 김명민을 처음 만났는데, 첫인상이 만만치 않았어요.
연기도 자기 나름대로 설정하고서 그걸 잘 소화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자넨 이거(배우) 평생 해" 그랬거든. 그다음부터 명민 군이 영화를 하면 꼭 보러 가요.
나와는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를 같이 하고 영화 '기생충'에 나온 박소담이나, 이번 '갈매기'를 같이 하는 이항나 같은 친구들도 연기 참 잘하지요.
-- 요즘 80대 원로 배우들이 연극 무대로 돌아와 투혼을 불태우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과연 무대의 매력이 뭘까요.
▲ 연기의 기본이고 바탕이죠. 영화·텔레비전을 주로 하는 배우들이 있고 거기서 잘 나가지만, 적어도 이런 한 시간 이상의 무대 경험을 해봐야 해요.
그래야 자기 연기력에 한계를 느껴야 새롭게 노력하고 발전도 하는 거예요.
신구 씨도 지금 무대에 서고 있지만, 그나 나나 같은 생각이에요.
우리 둘이 만약 화려한 스타가 돼서 정상에 올랐으면 아마 자만하고 거기 매몰됐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항상 우리 연기에 부족함을 느껴왔거든. 그런 의미에서 연극 무대는 배우로서 반드시 경험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 땐 연극 시작하면 국어사전 펴놓고 발음 공부부터 시작했는데, 지금은 훌륭한 연출가들도 많고, 도전할 여건이 충분하지요. -- 연기의 길 외에 잠깐 국회의원(14대)으로 활동하시며 정치도 하셨는데, 후회는 없으신가요.
또 정치인들이나 국가지도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다면요.
▲ 후회는 없어요.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지요.
작년에 연극 '리어왕'을 했는데, 마지막 대사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내가 그동안 너희들한테 너무나 무관심했다.
부자들아, 가난한 자의 고통을 몸소 겪어봐라. 그리고 넘치는 것들을 그들과 나누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하자." 이게 핵심입니다.
치자(治者)의 도리지요.
바닥에 내려가 봐야 백성들을 이해하는 거예요.
정권을 잡고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꼭대기만 봐서는 안 돼요.
저 밑에 아래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보고 같이 끌어 올려줘야 해요.
-- 아흔을 앞둔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신 것 같은데,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 그런 거 없어요.
지금 보시면 내가 좋아 보일지 몰라도 집에 가면 여기저기 아프고 고단해요.
그런데 해야 할 과제가 당장 있으니 다시 나와서 또 하는 거죠. 내게 주어진 과제들에 대한 책임감, 그걸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 때문에 하루하루 해 나가는 거지요.
이 공연 끝나면 또 3~4월엔 영화도 하나 찍어야 해요.
그 다음에 연극 '리어왕'을 6월에 다시 무대에 올리고, 그 후엔 드라마도 또 하나 해야 해요.
이렇게 할 일이 계속 있으니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가 없어요.
그저 무조건 움직여야 해요.
안 움직이고 '아, 내가 늙었으니 이제는…' 하고 있으면 나중에는 완전히 드러눕게 된다고. 연기는 힘이 닿는 데까지 계속할 거예요.
못하게 되는 때가 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 설을 앞두고 국민들께 덕담 한마디 해주신다면.
▲ 새해는 과거를 반성하고 부족했던 걸 좀 보완하는 계기가 되지요.
그동안 코로나19다 뭐다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는데, 당장 힘이 들어도 역사는 발전하게 돼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우리 젊은이들에게 얘기하고 싶은게, 우리가 무슨 애완동물이 아니잖아요? 부모의 귀여움만 받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잘 생각해 봐야 해요.
옛날과 다르게 우리 젊은이들은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내가 앞으로 뭘 할 것인가 생각해서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해요.
그리고 일단 길을 정하면 뚝심 있게 밀고 나가고. 기성세대는 뒤에서 묵묵히 도와줘야 합니다.
간섭하지도 말고 앞서 나가는 젊은 세대를 후진적인 사고로 자꾸 방해하지 말아야 해요. 그저 우리 젊은이들 밥 세 끼 든든히 잘 먹이고 꿈을 펼칠 환경과 조건을 제대로 조성해주는 데 힘써야 합니다. /연합뉴스
"세계 일류 만들어내는 요즘 젊은이들…기성세대가 꿈 오염시키지 말아야"
드라마·연극·영화로 올해도 분주…"건강 비결? 그런 거 없고, 그냥 할 일 할 뿐" 아흔을 바라보는 '국민 배우' 이순재(88)의 빠르고 거침없는 말에서는 팽팽한 탄력이 느껴졌다. 90년대 초반 국민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나 2000년대 인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보여줬던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 그대로인 듯했다.
작년에 러닝타임 세 시간이 넘어가는 셰익스피어의 대작 '리어왕'에서 주역 리어왕을 열연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던 그는 이번에는 연출자로 나서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후배 배우들과 함께 대극장 무대에 올리고 있다.
연출과 함께 배역까지 맡아 김수로, 소유진, 이항나, 강성진 등 후배 배우들과 직접 무대에도 선다. 특별한 건강관리법도 없고 그저 매일 아침 일어나면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어 열심히 할 뿐이라는 이 '영원한 현역 배우'를 설을 앞두고 지난 10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났다.
한 시간 반 남짓 이어진 대화에서 이순재는 한국을 비롯해 영국과 러시아 등 유럽의 극예술과 영화, 역사 전반을 넘나들었다.
여전히 지적인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의 눈빛은 과거 그가 출연했던 예능 프로 '꽃보다 할배'에서 부지런히 해외 여행지를 돌아다니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연기를 업으로 삼은 후배들에겐 외모만 출중한 '모델 스타'에 그치지 말고 끊임없는 공부와 단련을 통해 진정한 배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젊은이들에게서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본다는 그는 기성세대가 후배들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고 뒤에서 그저 묵묵히 밀어줘야 한다는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 지금 공연하는 '갈매기'는 어떤 작품인가요. ▲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의 대문호니까 더 덧붙일 얘기가 없지만, 이 작품은 그 안에 철학과 심오한 사상성을 갖고 있어요.
배경이 제정 러시아 말기인데 젊은이들은 암울한 미래에 절망하는 등 사회적으로 최악의 시기였죠. 당대 지성인 체호프가 '이건 안 되겠다, 뜯어고치지 않으면 민중과 서민들이 살 수가 없겠다' 하고 뼈저리게 느껴 체제 개혁에 대한 생각을 이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한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을 통해 어떤 시대정신을 보여준 것이죠. 두고두고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작품이에요.
원전에서 대사 한 마디라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원작 그대로 해보자 했지요.
제대로 된 후배 배우들과 함께 언젠가 꼭 해봤으면 했는데, 이렇게 무대에 올리게 됐습니다. -- 이 작품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뭘까요.
▲ 체호프가 이 작품을 쓸 때와 지금 우리 상황은 차이가 있죠. 그래도 청년 취업난이나 기성세대와의 충돌 등은 늘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갈매기'는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꿈,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꾼 청년들이 결국 기성세대의 억압과 욕심으로 좌절된다는 얘기거든요.
제가 늘 하는 얘기가 기성세대가 우리 젊은이들의 꿈을 오염시키지 말자는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 신체, 용모, 두뇌 모두 우리와는 전혀 달라요.
세계 일류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대중문화도 세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잠재된 역량이 발휘되고 있어요.
이런 젊은이들의 힘을 계속 발전시키고, 꿈을 실현할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주는 게 기성세대의 책임이에요.
-- 지금과 같은 '한류'를 젊은 시절에 예상하셨나요.
▲ 아휴, 예상 못 했죠. 공연 분야는 역사적으로도 우리가 후발 주자입니다.
영국엔 셰익스피어가 있었고, 고대 그리스 비극들부터 시작해서 유럽이 이쪽의 문화적 원류죠. 일본엔 가부키가, 중국엔 경극이 있었고요.
불행히도 우리는 한일합방 후 일본에서 들어오면서 공연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어요.
그 유명한 '이수일과 심순애'도 우리 작품이 아니고 일본 것을 번안했잖아요.
영화도 우리 60~70년대에 유현목·이만희·김수용·신상옥 등 좋은 감독들이 많았지만, 당시 '아휴 우리가 뭘…' 하면서 스스로 위축이 많이 됐었어요.
영화 제작자들도 국내시장에만 집중하고 영화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던 시대였지요.
사회에서는 우리를 '딴따라'라며 무시하는 시선도 많았고요.
세계를 바라보며 진취적으로 도전하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래도 임권택 감독 등 계속해서 훌륭한 감독들이 배출되긴 했지만… 그 당시에도 좀 더 과감히 자신을 갖고 세계무대에 도전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젠 한류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고, 누구든지 한번 도전해 볼 수 있게 됐잖아요?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 후배들이 충분한 역량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그럼요.
옛날 같으면 석 달을 무대에서 연습해야 겨우 되던 게 요즘 친구들은 한 달이면 충분해요.
옛날에 우리는 머리도 나빠서 잘 안 됐어. 내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에서 석좌교수로도 있는데, 학생들과 연극 수업을 해보면 이건 뭐 전혀 손색이 없어. 선생이 지도하기에 달린 거지 학생들은 아주 잘 따라온단 말이에요.
지금도 보세요.
진지희 같은 우리 젊은 친구들 무대에서 얼마나 잘합니까.
-- 그래도 후배들 연기에 아쉬움 같은 건 좀 있으시죠?
▲ 배우들이 너무 빨리 어떤 수준에 도달해 버리면 안주해 버리기가 쉬워요.
그게 다라고 생각해선 안 돼요.
한 단계 뚫고 더 올라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어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극복해야 합니다.
내가 소위 '스타'들과 작업하다 보면 좀 아쉬운 게 있을 때가 있어요.
돈도 많이 벌고 누가 봐도 스타가 됐지만, 옆에서 보면 '어, 이 친구가 조금만 더 보완하면 훨씬 더 좋은 배우가 될 텐데' 하는 게 있어요.
한 번은 내가 한 친구와 작품을 같이 하면서 "이거 끝나면 뭐 하냐"고 물었더니 그냥 말없이 웃더라고. 그래서 "돈은 많이 벌었지? 그런데 지금 그대는 '모델 스타'야. 쉬면서 미국에 건너가 '액터스 스튜디오' 같은 프로 연기 학교에 가서 연기도 다듬고 영어 공부도 하고 오면 좋잖아? 그런 노력을 하면 비로소 '모델 스타'에서 '액팅 스타'가 될 수 있어. 금상첨화지."라고 얘기해준 적이 있어요.
여기서 말한 '모델 스타'는 연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지는 못한 스타에요.
만날 깔끔하게 멋 내는 게 배우가 아니라 역할을 위해 항상 변신하는 게 배우지요.
자기의 연기 행위에 대해 스스로 판단을 못 하는 배우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내가 연기경력 60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주변에 떴다가 사라진 배우들이 수백 명이에요.
자기 단련을 멈추지 않아야 오래 가는 배우가 돼요.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 다 똑똑해서 이런 걸 잘 알고 있어요. -- 연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시는 후배 배우들은 누가 있을까요.
▲ 스타들 중에도 연기를 예술적 경지로 끌고 간 배우들이 있죠. 송강호, 최민식 같은… 이 친구들은 배우이자 장인들이에요.
송강호는 영화 '밀양'을 보고 '이 친구 정말 좋은 배우구나' 하고 느꼈어요.
극 중에서 자기 역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딱딱 절제하는 연기가 참 좋더라고. 또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하면서 김명민을 처음 만났는데, 첫인상이 만만치 않았어요.
연기도 자기 나름대로 설정하고서 그걸 잘 소화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자넨 이거(배우) 평생 해" 그랬거든. 그다음부터 명민 군이 영화를 하면 꼭 보러 가요.
나와는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를 같이 하고 영화 '기생충'에 나온 박소담이나, 이번 '갈매기'를 같이 하는 이항나 같은 친구들도 연기 참 잘하지요.
-- 요즘 80대 원로 배우들이 연극 무대로 돌아와 투혼을 불태우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과연 무대의 매력이 뭘까요.
▲ 연기의 기본이고 바탕이죠. 영화·텔레비전을 주로 하는 배우들이 있고 거기서 잘 나가지만, 적어도 이런 한 시간 이상의 무대 경험을 해봐야 해요.
그래야 자기 연기력에 한계를 느껴야 새롭게 노력하고 발전도 하는 거예요.
신구 씨도 지금 무대에 서고 있지만, 그나 나나 같은 생각이에요.
우리 둘이 만약 화려한 스타가 돼서 정상에 올랐으면 아마 자만하고 거기 매몰됐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항상 우리 연기에 부족함을 느껴왔거든. 그런 의미에서 연극 무대는 배우로서 반드시 경험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 땐 연극 시작하면 국어사전 펴놓고 발음 공부부터 시작했는데, 지금은 훌륭한 연출가들도 많고, 도전할 여건이 충분하지요. -- 연기의 길 외에 잠깐 국회의원(14대)으로 활동하시며 정치도 하셨는데, 후회는 없으신가요.
또 정치인들이나 국가지도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다면요.
▲ 후회는 없어요.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지요.
작년에 연극 '리어왕'을 했는데, 마지막 대사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내가 그동안 너희들한테 너무나 무관심했다.
부자들아, 가난한 자의 고통을 몸소 겪어봐라. 그리고 넘치는 것들을 그들과 나누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하자." 이게 핵심입니다.
치자(治者)의 도리지요.
바닥에 내려가 봐야 백성들을 이해하는 거예요.
정권을 잡고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꼭대기만 봐서는 안 돼요.
저 밑에 아래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보고 같이 끌어 올려줘야 해요.
-- 아흔을 앞둔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신 것 같은데,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 그런 거 없어요.
지금 보시면 내가 좋아 보일지 몰라도 집에 가면 여기저기 아프고 고단해요.
그런데 해야 할 과제가 당장 있으니 다시 나와서 또 하는 거죠. 내게 주어진 과제들에 대한 책임감, 그걸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 때문에 하루하루 해 나가는 거지요.
이 공연 끝나면 또 3~4월엔 영화도 하나 찍어야 해요.
그 다음에 연극 '리어왕'을 6월에 다시 무대에 올리고, 그 후엔 드라마도 또 하나 해야 해요.
이렇게 할 일이 계속 있으니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가 없어요.
그저 무조건 움직여야 해요.
안 움직이고 '아, 내가 늙었으니 이제는…' 하고 있으면 나중에는 완전히 드러눕게 된다고. 연기는 힘이 닿는 데까지 계속할 거예요.
못하게 되는 때가 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 설을 앞두고 국민들께 덕담 한마디 해주신다면.
▲ 새해는 과거를 반성하고 부족했던 걸 좀 보완하는 계기가 되지요.
그동안 코로나19다 뭐다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는데, 당장 힘이 들어도 역사는 발전하게 돼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우리 젊은이들에게 얘기하고 싶은게, 우리가 무슨 애완동물이 아니잖아요? 부모의 귀여움만 받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잘 생각해 봐야 해요.
옛날과 다르게 우리 젊은이들은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내가 앞으로 뭘 할 것인가 생각해서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해요.
그리고 일단 길을 정하면 뚝심 있게 밀고 나가고. 기성세대는 뒤에서 묵묵히 도와줘야 합니다.
간섭하지도 말고 앞서 나가는 젊은 세대를 후진적인 사고로 자꾸 방해하지 말아야 해요. 그저 우리 젊은이들 밥 세 끼 든든히 잘 먹이고 꿈을 펼칠 환경과 조건을 제대로 조성해주는 데 힘써야 합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