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밤'에 푹 빠졌던 고등학생, 30년 뒤 169억 '잭팟' [긱스]

"제 인생은 오디오예요. 이름 가운데 글자를 바꾸면 '오디오'가 되거든요. 운명이라 생각했죠. 완전히 한 우물만 팠어요."

한경 긱스와 만난 오현오 가우디오랩 대표(50·사진)는 '오디오'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눈을 반짝였다. 그는 오디오를 사랑해서 오디오 회사를 차렸다. 가우디오랩은 '오디오 기술의 끝판왕'을 목표로 하는 회사다. 이 회사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음량을 평준화하고 원하는 소리만 뽑아낼 수 있는 기술을 갖췄다. 이를테면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특정 악기의 소리만 뽑아내거나 음향에 입체감을 더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에서 실제와 같은 몰입감을 구현할 수 있다. 회사는 이 기술을 통해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인 CES2023에서 혁신상을 수상했다.

가우디오랩은 공간 음향 기술을 활용해 ‘사운드인더랩’이라는 영상 시리즈를 제작하기도 했다. ‘딩고’라는 유튜브 채널로 유명한 콘텐츠 제작 업체 메이크어스와 협업해 만들어낸 결과다. 이승환, 이날치 등 유명 가수들이 등장하는 이 영상은 시청자에게 숲속에서 콘서트 노래를 듣는 것 같은 효과를 준다. 또 음원 분리 기술은 예능 프로그램 '히든싱어7'에서 1980년대 가수 故김현식의 목소리를 음원에서 분리해내는 데 쓰였다.

회사엔 대기업과 벤처캐피털(VC)로부터 러브콜도 잇따랐다. 삼성벤처투자, 네이버D2SF, 소프트뱅크벤처스, LB인베스트먼트 등이 이 회사에 169억원을 베팅했다.
가우디오랩은 CES2023에서 혁신상을 탔다. KOTRA가 후원하는 한국관에 부스를 차렸다.

집념의 학창시절, 일부러 성적 조절하기도

오 대표와 오디오의 인연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촌형이 선물해 준 믹스테이프를 들으면서 팝송에 푹 빠졌다. 중학생이던 그는 전축을 사달라고 아버지를 졸랐다. 그의 방 3분의 1 크기에 달하는 전축을 들였다. 전축에서 나오는 음악, 아니 '소리' 그 자체가 좋았다.

음악은 좋아했지만, 노래는 잘 못했다. 악기 연주도 이것 저것 시도해봤지만 젬병이었다. 그래서 예술가가 되기는 글렀다 싶었다. 다행히 공부머리는 있어서 전교 1등을 밥먹듯이 했다. 이걸 살려 오디오를 연구하는 분야로 진로를 잡았다. 전자공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교시절엔 '별이 빛나는 밤에'가 라디오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대학생들이 캠퍼스 소식을 전하는 '캠퍼스 요즘'이라는 코너를 좋아했다. 진행을 맡았던 연세대 방송국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마음을 뺏겼다. 그는 "꼭 연세대에 입학해서 그 선배를 만나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회상했다.

문제는 오 대표의 성적이 '과도하게' 좋았다는 점이다. 서울대가 아닌 연세대를 가겠다는 그를 담임 선생님은 뜯어말렸다. 한 때는 꾀를 쓰기도 했다. 모의고사를 볼 때 일부러 성적을 낮게 조절해 '저 연세대밖에 못 가요'라며 시위를 벌였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이가 없어 펄쩍 뛸 얘기다.

결국 실제로 연세대 전자공학과에 갔다. 집념의 결과였다. 방송국도 들어갔다. 음향 기기를 만지는 엔지니어로 일했다. 대학교 4학년 땐 음향공학이란 학문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당시 음향공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학교는 서울대와 연세대 뿐이었는데, 마침 연세대 대학원에 갈 기회가 열린 셈이었다. '딱 맞는' 학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다음 목표를 음향공학 대학원 진학으로 잡았다. 그리고 또 이뤘다. 지금까지도 은사로 생각하는 윤대희 명예교수 연구실에 들어가 1996년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음향공학은 소리와 진동을 다루는 학문이다. 쉽게 말하면 소음과 목소리가 섞여 있을 때 소음을 제거하는 일을 하거나, 여러 악기 소리를 조화롭게 만들어내는 것, 방에서 나는 소리를 마치 콘서트장에서 나는 소리처럼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 등을 연구한다. 가우디오랩의 모태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2010년 8월 퇴사 후 사무실 없는 1인 창업자 시절을 끝내고 첫 번째로 낸 법인 사무실(현 역삼벤처텔)에 놀러 온 오 대표의 쌍둥이 딸들. 사진은 2012년 여름.

두 번의 창업... 가우디 성당 앞에서 탄생한 회사

2002년 음향공학 박사과정을 마친 이후엔 LG전자에 입사했다. 디지털TV 연구소가 첫 직장이었다. 월드컵 특수 덕에 TV 수요가 폭증하던 시기였다. TV에 들어가는 음향 기술을 다뤘다. 그는 "LG전자 시절에 '클리어 보이스' 기술을 처음 개발했는데, 아직까지도 TV에서 자주 쓰인다"며 "배경음 때문에 대사가 잘 들리지 않을 때 목소리를 명확하게 들려주는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LG전자를 퇴사했을 때는 2010년 즈음이었다. TV라는 디바이스에서 화면이 아닌 '소리'에 신경쓰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음향 연구 분야가 자꾸 변방으로 밀린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주도적으로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자신은 있었다. LG전자라는 후광보다 '오현오'라는 이름이 업계에서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LG전자에서 일하면서 1400개가 넘는 특허를 내 이름으로 등록했다"며 "이런 '트랙 레코드'를 갖고 사업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고 했다.
"유레카 모먼트!" 2013년 9월 MPEG-H 표준에 채택된 바이노럴 기술이 발명되는 순간이라고. 이 기술은 가우디오랩의 초석이 됐다.
과감히 창업의 길로 뛰어들었다. '오디오'를 잠시 내려놓고 윌러스표준기술연구소라는 특허 관리 전문 회사를 차렸다. 특허를 직접 출원하고 이를 관리, 기술이전하는 회사다. 지금도 대기업 못지 않게 많은 특허를 갖고 있다.

2014년이었다. 메타(당시 페이스북)가 VR 회사 오큘러스를 2조원이나 주고 인수했다. VR 시장이 급성장할 징조로 봤다. 윌러스는 마침 이 시장에서 쓰일 만한 바이노럴 렌더링(Binaural Rendering)이라는 표준 기술을 갖고 있었다. 바이노럴 렌더링은 소리가 두 귀로 흘러오기까지의 모든 프로세스를 신호화하는 기술이다. 개별 오디오 신호의 방향과 머리 위치 등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고 필터링해 현실 세계의 소리와 거의 흡사한 소리를 헤드폰을 통해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VR 기기에 딱 맞는 기술이었다.

오 대표는 내려놨던 오디오를 다시 꺼내들 때라고 생각했다. 이걸로 꼭 새로운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페인에서 국제표준기술 회의가 열릴 때,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성당 앞에서 공동 창업자와 함께 다짐했다. 서울로 돌아가면 VR 오디오테크를 꼭 해보자고. 이름은 '프로젝트 가우디'로 정했다.

"처음엔 새 창업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고요. 그런데 투자자들이 분사해 따로 법인을 만들라고 제안했어요. 기존 회사는 다른 특허들이 많아 포트폴리오가 복잡하니, 오디오테크만 따로 떼 내서 창업하면 투자하겠다고요. 그렇게 분사하게 됐습니다. 평생 사랑했던 오디오를 놓치기 싫었거든요. 대신 회사를 나오면서 제가 갖고 있던 지분도 절반 넘게 팀원들에게 나눠줬습니다."
가우딘(가우디오랩 구성원을 지칭하는 말) 2호, 1호, 3호 (왼쪽부터). 투자도 받기전 가계약한 직원 3명의 모습이다. 제품 개발에 들어가 첫 번째 코드 프리즈(SW 개발 마감)를 끝낸 기념 회식 날.

"메타버스 세상의 '돌비' 될 것"

2015년 시드(초기) 투자를 유치하고 꽤 잘 나갔다. VR이 '핫'한 키워드였다. 회사 이름에 VR만 들어가도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이 돈보따리를 싸들고 온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때였다. 오 대표는 "IR 피칭을 하면서 당시 구글이 만든 카드보드 VR 기기에 우리가 만든 공간 음향 기술을 넣은 데모 콘텐츠를 보여줬다"며 "이걸 체험해보고 투자자들이 너도나도 투자하겠다고 난리였다"고 했다.

그런데 2017년이 되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메타가 내놓은 오큘러스 첫 상용화 제품의 판매량은 기대에 한참 못미쳤다. 디즈니 같은 글로벌 메이저 콘텐츠 제작사가 VR을 새 먹거리로 삼을 것이라는 기대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VR '붐'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 때 느낀 건, 산업의 새로운 키워드가 한 번 떠올랐을 때 단순한 유행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게 참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VR 붐이 꺼지지 않을 줄 알았죠. 최근 몇 년 새 뜬 메타버스 같은 키워드도 마찬가지예요. 언젠간 한 번 흐름이 죽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키워드를 무시할 수는 없어요. 당시에는 '메인 스트림'이니까요. 유행을 거치면서 쌓여가는 혁신들이 나중에 이 키워드를 '진짜'로 끌어올리겠죠."

회사에 남은 돈은 점점 줄어만 갔다. 6개월치 월급을 주고 나면 폐업해야 할 처지였다. 오 대표는 '와신상담'을 선포했다. 직원들에겐 회사를 떠나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 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회사에 남았다. 팀워크를 다지기 위해 '원 팀' 체제로 조직을 개편했다. 매일 아침 10시에 전 직원이 모여 어제 한 일과 오늘 할 일을 브리핑하고 피드백했다.

그러면서 가진 생각은 VR 시장이 아닌 우리 기술이 갖고 있는 '본질'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소리를 입체적으로 들리게 하는 '공간 음향' 기술은 원래부터 갖고 있었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열풍이 몰고 온 영상 콘텐츠에도 수요가 있다고 봤다. 거기다 '음량 평준화 기술'을 개발했다. 영상을 볼 때 갑자기 소리가 크거나 작게 나오는 데서 오는 불편함을 해결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미국 소비자기술협회(CTA)와 미국 국가표준협회(ANSI)의 기술 표준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타깃을 변경한 판단은 적중했다. 가우디오랩의 기술은 네이버나우, 플로, 벅스 등에 공급되고 있다.조만간 국내 유명 OTT와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과도 추가 협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폐업 위기에 몰렸던 회사는 2019년부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가우디오랩은 메타버스 세상의 '돌비'가 되는 게 목표다. 미국 회사 돌비는 세계 음향 기술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뉴욕 증시에서 시가총액이 10조원에 달한다. 극장이나 비싼 오디오 구석엔 으레 돌비의 마크가 찍혀 있다. 오 대표는 "전 세계 사람들이 하루에 한 번씩은 가우디오랩의 음향 기술이 담긴 소리를 듣게 만들 것"이라고 했다.
참, 한가지 더

애월부터 비자림까지... 가우디오랩 사무실은 제주도
가우디오랩 사무실 입구에 있는 대형 미디어 월의 모습. 가끔 생일인 직원을 위해 축하 콘텐츠도 넣는다고 한다.
서울 테헤란로 한복판에 있는 가우디오랩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ㄱ'자 형태의 커다란 미디어 월이 반겨준다. 이 미디어 월의 화면엔 제주 바다의 풍경이 가득하다. 사무실 입구는 '제주 국제공항'으로 불린다. 벽면엔 'OLLE ROUTE'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무실 복도를 제주 올레길처럼 꾸민 것이다.
가우디오랩의 청음실 이름은 비자림이다.
회의실 이름은 '애월'과 '월정'이다. 휴게 공간은 '우도'로 정했다. 조용한 공간에서 회사의 음향 기술을 실험하는 공간인 청음실의 이름은 '비자림'이다. 심지어 화장실 이름은 '통시'다. 화장실과 돼지를 기르는 공간이 합쳐진 제주도만의 주거 공간인 '통시'에서 따온 말이다. 사무실을 위에서 보면 실제 제주도에서 애월, 월정리, 우도, 공항이 배치된 위치와 똑같다고 한다. 오 대표는 "엄청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언젠간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는 내 로망이 담긴 것"이라면서도 "향후 본사를 제주로 옮길 계획을 직원들과 논의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