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숙 영인문학관장 "내 삶 더듬어보는 글쓰기 작업할 것"

남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서재 올해 9월 일반 공개
에세이 '글로 지은 집' 펴내…신혼부터 평창동까지 집 이야기 담아
"집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앞으로 여러 면에서 내 삶을 더듬어 보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집은 그 출발점인 셈이죠."
최근 에세이 '글로 지은 집'(열림원)을 펴낸 강인숙(90) 영인문학관장의 말이다.

책은 강인숙·이어령 부부가 거쳐 간 여덟 곳의 집 이야기를 담았다.

한파가 찾아온 25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내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서재에서 강 관장을 만났다.
그는 구순이지만 정정한 모습이었다.

건강해 보인다고 하자 강 관장은 "한 끼만 못 먹어도 못 일어난다.

세 끼 다 먹고 많이 쉬면서 간신히 버틴다"며 손사래를 쳤다. 서재는 이 전 장관이 읽던 책들로 가득했다.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같은 고전 도서부터 로슬링의 '팩트풀니스' 같은 비교적 최근 책까지 골고루 구비돼 있었다.

고인은 다독가였다.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책을 사 읽었다.

'내가 이걸 다 볼 수 있으려나'라고 말하면서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책을 구매했다"고 한다.

그런 이어령 선생의 손길이 닿은 소장 책들을 올해 9월쯤에는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강 관장은 "자료 정리를 하는 데 1년이 걸렸다"며 "나머지 정리를 끝낸 후 관람객에게 공개할 것이며 운영은 한 번에 사람들이 몰리지 않도록 예약제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부부는 서재를 갖고자 오랜 시간 분투했다.

부부는 연구를 위해 자신만의 서재가 절실했지만, 전후 그들은 가난했다.

신혼은 단칸방에서 시작했기에 서재는 언감생심이었다.

어항 속 붕어까지 얼어붙은 북향 방, 별채 같은 셋집, 일본식 적산가옥 등을 두루 거쳐 마침내 첫 집을 가졌을 때는 "방해받지 않고 아이를 기를 수 있는 공간이 생겨서 너무 좋았다"고 회고했다.

"처음 산 건 17평짜리 연립주택이었어요.

첫 집을 살 때가 생활인으로서 느끼는 하나의 절정이었던 것 같아요.

첫 아이를 가졌던 때 하고요.

"
부부는 신당동을 거쳐 마침내 1967년 성북동에서 처음으로 꿈에 그리던 각자의 서재를 가졌다.

그곳에서 칠 년을 보낸 후 1974년 평창동에 정착했다.

가파른 지대였기에 집을 지었을 때는 마을에 그들의 집밖에 없었다.

외등도 없고, 전기도 자주 끊겼으며 날씨가 추워지면 수도관도 터졌다.

세월이 흘러 이웃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상황은 개선됐지만, 이제는 성인이 된 아이들이 각자의 삶을 찾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부부의 삶은 단조로워졌고 적적해졌다.

"나간 자리가 살펴져서 슬프고 외로웠다.

우리는 그 외로움을 공부하고 글 쓰는 일로 메꾸어갔다.

"(책 297~298쪽)
식구가 줄어든 데다가 박물관 건립은 숙원이어서 2007년 집을 허물고 박물관을 지었다.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건축비가 모자라 은행 빚을 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집을 짓는 도중 미국에 있던 외손자가 숨졌다.

울다가 일어나서 내일 낼 건축비 청구서 비용을 마련해야 했다.

그는 울면서 소장품을 팔았고, 울면서 돈을 빌리러 갔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 갔는데, 정말 정신 차리기가 어려웠죠. 어떻게 살아남았나 싶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청구서가 날 살렸구나 싶기도 하고요.

"
지난 2015년 대장암에 걸린 남편은 오랜 투병 끝에 작년 2월 세상을 떠났다.

강 관장은 "망령이 나지 않는다면 아무 때나 떠나도 좋을 것 같다.

이미 너무 많이 살았다"고 했다.

다만 "모양 구기지 않고 원하는 일 하다가 나뭇잎 시들듯이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원하는 건 글을 쓰는 것이다.

남편과 자신이 글로 지은 집에서 남편이 그랬듯, 자신도 글을 쓰다가 가는 것이다.

"에세이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집도 만들고 있고요.

평론집을 냈으니까 올해에는 문화 기행 에세이 3권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건강이 허락한다면요.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