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전설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입력
수정
'프리마 돈나(Prima Donna)'라는 용어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요. 이탈리아어로 '제1의 여인'라는 의미로, 주로 오페라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인물을 가리킵니다. 오페라 여주인공은 대부분 여성 성악가 중 가장 높은 음역대를 가진 소프라노가 연기합니다. 고음을 잘 부르면서 연기까지 능숙하게 해야 하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큰 사랑을 받은 프리마 돈나를 꼽자면 단연 이 사람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설의 디바'로 불리는 마리아 칼라스(1923~1977)입니다. '여신'이라는 뜻의 디바라는 단어 자체도 소프라노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린 인물을 이릅니다.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오페라 '토스카'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워너클래식 유튜브 채널
톰 볼프 감독의 다큐멘터리 '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2019)는 칼라스의 노래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칼라스가 선보였던 오페라 공연 영상, 인터뷰 영상, 미공개 회고록 등으로 구성돼 있죠. 칼라스가 뿜어내는 아름답고 청아한 고음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의 열정적인 태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칼라스의 인생은 한 노래의 제목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라는 곡입니다. 칼라스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지아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 나오는 아리아입니다. 이 노래 제목처럼 칼라스의 삶은 노래와 사랑이 전부였죠. 칼라스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 출신의 부모님이 이민 온 후 칼라스가 태어난 겁니다. 칼라스는 중산층 가정에 속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남모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들을 바란 부모님은 칼라스가 딸로 태어나자 크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뚱뚱했던 칼라스는 종종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한동안 몸무게가 많이 나갔는데요. 연기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 30㎏를 감량했습니다.
칼라스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탓에 괴로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칼라스의 천부적인 소질을 알아보고, 음악 교육을 혹독하게 시켰습니다. 어린 칼라스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찬 과정이었죠. 하지만 다행히 칼라스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극복해 나갔습니다.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오페라 '잔니 스키키'의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메디치TV 유튜브 채널
그가 14살 땐 부모님이 이혼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칼라스는 어머니를 따라 그리스로 가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칼라스는 소프라노 엘비라 데 이달고를 만나 다양한 창법을 배웠습니다. 칼라스의 음색은 소프라노 중에선 다소 낮고 굵은 편이었는데, 이달고의 도움을 받아 점차 좋아졌습니다.
칼라스의 끈질긴 노력도 빛을 발했습니다. 칼라스는 자신이 레슨을 받는 시간이 아닐 때도 줄곧 이달고의 옆에 있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지적받는 사항들까지 파악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 겁니다. 덕분에 칼라스는 학생 때부터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는 19살에 '토스카'의 토스카 역으로 데뷔했습니다. 24살엔 이탈리아로 가 '라 조콘다'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가장 큰 기회는 27살에 찾아왔습니다. 이탈리아의 대표 오페라 극장인 라 스칼라 극장에 입성하게 된 건데요. 당시 라 스칼라 극장을 스타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가 오페라 '아이다' 출연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쓰러진 겁니다. 칼라스는 테발디의 대타로 급히 투입됐죠. 공연 연습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그의 무대는 관객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노인과 바다> 등을 쓴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황금빛 목소리를 가진 태풍"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입니다.
이후 칼라스는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그가 출연한 오페라는 '나비부인' '카르멘' 등 46편에 달합니다. 오페라 20편의 아리아 전곡을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오페라 '노르마'의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워너클래식 유튜브 채널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위기도 찾아왔죠. 그가 35살이 되던 해에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노르마' 공연에 올랐을 때입니다. 이탈리아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이 공연을 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공연 직전 기관지염에 걸려 그의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약을 먹고 가까스로 무대에 올랐지만 결국 중단했죠. 이 일로 인해 칼라스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다행히 칼라스는 건강을 회복한 후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서 화려하게 재기했습니다.
아름다워 보이는 사랑도 칼라스에겐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는 26살에 27살 많은 사업가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와 결혼했습니다. 처음엔 순탄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며 적극 도왔죠. 하지만 실은 칼라스가 번 돈을 빼돌렸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칼라스는 36살이 되던 해에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 사유는 34살에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그리스의 '선박왕'으로 불렸던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였습니다. 칼라스는 부유하면서도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오나시스에게 흠뻑 빠졌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도 비극적이었습니다. 칼라스는 10년 동안 연인 관계를 맺었던 오나시스와 결혼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오나시스가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그 여성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였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기분은 어땠을까요. '토스카'에서 토스카는 자신이 사랑하는 화가 카바라도시가 다른 여성과 만난다는 의심을 하게 되며 큰 슬픔에 빠지는데요. 칼라스는 그 순간의 토스카를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오나시스는 결혼 이후 다시 칼라스를 그리워하며 재클린과 이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혼 준비를 하던 중 세상을 떠났고, 칼라스는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엔 파리에서 칩거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우울증과 약물중독에 시달리다, 54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두고 자살설이 나오기도 했죠. 누구보다 열렬히 노래하고 뜨겁게 사랑한 칼라스. 그의 노래를 들으며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보는 건 어떨까요. 칼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비망록은 나의 노래 안에 담겨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니까."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큰 사랑을 받은 프리마 돈나를 꼽자면 단연 이 사람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설의 디바'로 불리는 마리아 칼라스(1923~1977)입니다. '여신'이라는 뜻의 디바라는 단어 자체도 소프라노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린 인물을 이릅니다.
톰 볼프 감독의 다큐멘터리 '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2019)는 칼라스의 노래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칼라스가 선보였던 오페라 공연 영상, 인터뷰 영상, 미공개 회고록 등으로 구성돼 있죠. 칼라스가 뿜어내는 아름답고 청아한 고음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의 열정적인 태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칼라스의 인생은 한 노래의 제목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라는 곡입니다. 칼라스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지아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 나오는 아리아입니다. 이 노래 제목처럼 칼라스의 삶은 노래와 사랑이 전부였죠. 칼라스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 출신의 부모님이 이민 온 후 칼라스가 태어난 겁니다. 칼라스는 중산층 가정에 속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남모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들을 바란 부모님은 칼라스가 딸로 태어나자 크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뚱뚱했던 칼라스는 종종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한동안 몸무게가 많이 나갔는데요. 연기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 30㎏를 감량했습니다.
칼라스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탓에 괴로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칼라스의 천부적인 소질을 알아보고, 음악 교육을 혹독하게 시켰습니다. 어린 칼라스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찬 과정이었죠. 하지만 다행히 칼라스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가 14살 땐 부모님이 이혼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칼라스는 어머니를 따라 그리스로 가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칼라스는 소프라노 엘비라 데 이달고를 만나 다양한 창법을 배웠습니다. 칼라스의 음색은 소프라노 중에선 다소 낮고 굵은 편이었는데, 이달고의 도움을 받아 점차 좋아졌습니다.
칼라스의 끈질긴 노력도 빛을 발했습니다. 칼라스는 자신이 레슨을 받는 시간이 아닐 때도 줄곧 이달고의 옆에 있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지적받는 사항들까지 파악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 겁니다. 덕분에 칼라스는 학생 때부터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는 19살에 '토스카'의 토스카 역으로 데뷔했습니다. 24살엔 이탈리아로 가 '라 조콘다'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가장 큰 기회는 27살에 찾아왔습니다. 이탈리아의 대표 오페라 극장인 라 스칼라 극장에 입성하게 된 건데요. 당시 라 스칼라 극장을 스타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가 오페라 '아이다' 출연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쓰러진 겁니다. 칼라스는 테발디의 대타로 급히 투입됐죠. 공연 연습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그의 무대는 관객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노인과 바다> 등을 쓴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황금빛 목소리를 가진 태풍"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입니다.
이후 칼라스는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그가 출연한 오페라는 '나비부인' '카르멘' 등 46편에 달합니다. 오페라 20편의 아리아 전곡을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위기도 찾아왔죠. 그가 35살이 되던 해에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노르마' 공연에 올랐을 때입니다. 이탈리아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이 공연을 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공연 직전 기관지염에 걸려 그의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약을 먹고 가까스로 무대에 올랐지만 결국 중단했죠. 이 일로 인해 칼라스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다행히 칼라스는 건강을 회복한 후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서 화려하게 재기했습니다.
아름다워 보이는 사랑도 칼라스에겐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는 26살에 27살 많은 사업가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와 결혼했습니다. 처음엔 순탄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며 적극 도왔죠. 하지만 실은 칼라스가 번 돈을 빼돌렸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칼라스는 36살이 되던 해에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 사유는 34살에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그리스의 '선박왕'으로 불렸던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였습니다. 칼라스는 부유하면서도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오나시스에게 흠뻑 빠졌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도 비극적이었습니다. 칼라스는 10년 동안 연인 관계를 맺었던 오나시스와 결혼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오나시스가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그 여성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였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기분은 어땠을까요. '토스카'에서 토스카는 자신이 사랑하는 화가 카바라도시가 다른 여성과 만난다는 의심을 하게 되며 큰 슬픔에 빠지는데요. 칼라스는 그 순간의 토스카를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오나시스는 결혼 이후 다시 칼라스를 그리워하며 재클린과 이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혼 준비를 하던 중 세상을 떠났고, 칼라스는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엔 파리에서 칩거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우울증과 약물중독에 시달리다, 54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두고 자살설이 나오기도 했죠. 누구보다 열렬히 노래하고 뜨겁게 사랑한 칼라스. 그의 노래를 들으며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보는 건 어떨까요. 칼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비망록은 나의 노래 안에 담겨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니까."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