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내만 낸 '갈라파고스 대기업집단 규제'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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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우리 기업들이 해외에 나가 경쟁하는 데 지장이 되는 규제는 과감하게 글로벌 스탠더드로 바꿔야 한다.”
김소현 경제부 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6일 공정거래위원회, 법무부, 법제처로부터 ‘2023년 정책 방향’을 보고받은 후 이렇게 당부했다. 마침 이날 공정위 보고에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거리가 먼 ‘갈라파고스 규제’ 관련 내용이 포함됐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공시대상기업집단 등 대기업집단 규제다.공정위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과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기준 자산총액을 기존 10조원, 5조원에서 국내총생산(GDP) 연동 방식으로 바꿔 지정 기업 수를 줄이겠다고 밝혔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은 지정 기준을 내년부터 GDP의 0.5%로 바꾸기로 했고, 공시대상기업집단은 GDP의 0.2% 또는 0.3%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공정위는 ‘대기업집단 제도의 합리화’라고 자평했지만 기업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제도의 전제 자체가 지금의 기업 환경과 맞지 않아 ‘찔끔 완화’로는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기업 규제는 경쟁법(공정거래법)에 근거를 둔 세계 유일무이한 제도다. 미국 독일 등 세계적으로 100여 개국이 경쟁법을 집행하고 있지만 이들은 대기업 지배구조 관련 조항을 경쟁법에서 규율하지는 않는다. 기업 규모를 기준으로 정부가 나서 대기업집단을 규정하고 고시해 규제하는 사례도 한국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 사이에는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꺼려 투자를 줄이고 사업 재편을 기피해 중견기업에 머무르는 ‘피터팬증후군’이 만연해 있다.
1980년대 대기업집단 규제 도입 당시 제도 존재의 근간이 됐던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지금은 크게 완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카카오 네이버처럼 과거에 없던 플랫폼기업이 연이어 등장하는데 30년 넘은 낡은 규제는 여전하다. 한때는 기업 지분을 사고파는 게 주요 업무인 사모펀드(PEF)까지 대기업 규제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공정한 시장 질서를 수호하기보단 기업 성장을 저해하는 대기업집단 제도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는 기업들의 목소리에 공정위가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