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원짜리 바나나, 문 앞 웅크린 노숙인…리움에 '악동'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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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기대평 이벤트]30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입구. 낡은 목장갑을 끼고 구겨진 외투를 입은 채 모자를 푹 눌러쓴 한 남자가 양팔로 몸을 감싸고 비스듬히 누워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노숙인이 웅크린 채 앉아 있다. 이들의 이름은 동훈과 준호다. 현대미술계의 가장 ‘문제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우리치오 카텔란(63)의 올해 신작이자, 리움미술관이 올해 개관전으로 여는 전시 ‘WE’의 오프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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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미술관 올해 첫 전시 - 마우리치오 카텔란 'WE'
고정관념 깨고 미술시장 비판한
현대미술계의 '문제적 작가'
리움의 높은 문턱에 유쾌한 도전
'1억원 바나나' 등 38점 전시
작품 관통하는 키워드는 '실패'
히틀러 등 대중적 이미지 차용도
관람객-작품 하나되는 전시 기획
작품 보호라인 없애고 무료 관람
카텔란은 2004년 개관 이후 다소 폐쇄적이던 리움미술관을 ‘열린 공간’으로 뒤바꿨다. 미술관 로비는 기차역 대합실처럼 꾸며졌고, 도시의 불청객 취급을 받았던 비둘기들(유령, 2021)은 미술관 곳곳에서 관람객들을 쳐다본다. 세발자전거를 탄 어린아이(찰리, 2003)가 미술관 곳곳을 종횡무진 달리고, 소설 <양철북>의 오스카를 연상케 하는 소년(무제, 2003)이 전시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 드럼을 쳐댄다.
미술계를 꼬집고 비트는 악동
이탈리아 태생인 카텔란은 자신을 ‘미술계의 침입자’로 규정한다. 1990년대 현대미술계에 혜성처럼 떠오른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긴 힘들다. 설치와 조각, 회화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기존의 제도와 고정관념, 미술시장 시스템, 정치적 이슈 등을 자유자재로 비튼다. 웃음이 터질 듯 유쾌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품도 많다.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젊은 작가로 선정돼 배당받은 공간을 광고판으로 내놓고 한 향수회사가 사용하게 하는가 하면, 1999년 밀라노에서 열린 전시 첫날엔 그의 작품 거래를 담당하는 갤러리스트 마시모 드 카를로를 전시장 벽에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인 뒤 3시간가량 그대로 걸려 있게 하기도 했다.카텔란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것은 ‘1억원짜리 바나나 사건’이다. 2019년 아트페어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흰 벽에 회색 테이프로 생바나나를 붙이고는 ‘코미디언’이라고 이름 붙였다. 단순히 벽에 붙은 이 바나나가 12만달러에 팔렸고, 한 작가는 벽에 붙은 바나나를 떼서 먹어버리는 퍼포먼스도 했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예술품에 가격을 매겨 사고파는 행태, 작품과 작품이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대미술계의 현상, 나아가 갤러리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한 큰 사건이었다”고 했다.실패라는 테마, 그리고 차용
이번 전시엔 그의 대표작 ‘코미디언’을 비롯해 ‘모두’ ‘우리’ ‘아홉 번째 시간’ 등 38점이 전시됐다. 2011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회고전 이후 가장 큰 규모다. 리움 관계자는 “한두 점의 문제적 작품으로만 카텔란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며 “30여 년에 걸친 그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공통점과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작품 이해의 키워드는 ‘실패’와 ‘차용’이다. 전시작 중엔 세 살 이후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북 치는 소년, 양복을 입은 채 옷걸이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년의 남자(무제, 2000), 텅 빈 책장을 마주하고 양 손등에 연필이 못처럼 박혀 옴짝달싹 못하는 작은 카텔란(찰리는 서핑을 안 하잖나, 1997) 등 인생과 유년기, 가족관계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이 많다.카텔란의 작품이 파격적이면서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가 미술계와 현대사회에 널려 있는 이미지들을 합법적으로 도용하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사에 획을 그은 작품들을 빌려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는 카텔란을 미술계는 ‘대담한 표절자’라고 부른다.
‘소외된 것들’을 다시 보다
카텔란의 작품은 단순한 도발에만 그치지 않는다. 소외된 것들(비둘기, 노숙인)을 다시 보고, 잊혀질 만한 일들(9·11 테러, 히틀러의 세계대전)을 되새기며, 정치적인 이슈(트럼프 당선, 운석에 깔린 교황)를 과감하게 지적하면서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토론하도록 하기 때문이다.미술관의 권위에 유쾌한 도전을 해온 그는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이 자신의 작품들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며 작품 보호 라인이나 별도 경보 센서를 두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미술관 측은 바닥에 놓이거나 무심코 부딪칠 수 있는 작품들에만 최소한의 센서를 설치했다. 리움 관계자는 “각 작품에 담긴 맥락과 유머 속의 촌철살인을 찾아보길 바란다”며 “카텔란을 시작으로 1990년대 세계 미술계에 영향을 준 작가를 꾸준히 소개할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7월 16일까지.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