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가 3D로 돈 버는 시대"…삼성 출신 부부의 '승부수' [긱스]
입력
수정
'로블록스 3D 모델링' 개발한 부부 창업가게임 엔진 1위 유니티는 2030년이면 3차원(3D) 그래픽 콘텐츠의 침투율(비중)이 50%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메타버스 플랫폼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래픽 이미지의 대세는 2D에서 3D로 넘어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3D 디자인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엔닷라이트가 겨냥하고 있는 시장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3D 프린터용 제품 설계 소프트웨어에서 메타버스 콘텐츠 솔루션으로 '피봇'에 성공한 이후, 전자상거래, 부동산 및 자동차 인테리어 등 기업 대상(B2B) 시장으로 보폭을 확대하고 있는데요. 직접 3D 엔진을 개발한 '뚝심'의 부부 창업가를 한경 긱스(Geeks)가 만나봤습니다.“메타버스 플랫폼 로블록스에서 게임 콘텐츠를 만드는 1000만 크리에이터의 80%가 10대예요. 10대 청소년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3차원(3D) 애셋(자산)을 만들어 돈 버는 게 사회 뉴스로 나올 수도 있죠.”3D 디자인 소프트웨어 ‘엔닷캐드’를 개발한 엔닷라이트의 박진영 대표가 내다본 머지않은 미래다. 엔닷라이트는 자체 개발한 3D 엔진을 활용해 간편하게 고품질 3D 디자인을 만들 수 있는 쉬운 모델링 소프트웨어를 공략하고 있다. 로블록스 스튜디오의 약점인 ‘곡면 모델링’을 엔닷캐드로 보완해 만든 각종 3D 이미지를 로블록스에 게시할 수 있다. 정식 출시 1년여만에 엔닷캐드에서 만들어진 3D 애셋은 30만건이 넘고, 전체 이용자의 60%가 10대다.
쉬운 3D 디자인으로 '승부수'
12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네이버 신사옥 1784에서 만난 박 대표는 “3D 모델링 소프트웨어 경쟁에서 쉬운 영역은 텅텅 비어있다”고 말했다. 엔닷라이트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쉬운 모델링' 시장을 공략하는 이유다.그는 "Z세대는 게임 아이템을 만들어서 돈을 벌어본 세대"라며 "3D 애셋을 사본 경험이 있는 10대들이 5년 뒤 주요 소비층이 됐을 땐 거대한 3D 크리에이터 이코노미가 형성될 것"이라고 내다봤다.로블록스 스튜디오와 달리 게임엔진 1위인 유니티 소프트웨어는 700만명의 개발자 대부분이 전공자들이다. 10대 비전공 크리에이터들이 사용하기엔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용량도 너무 크다. 이에 엔닷라이트는 게임과 제조 분야 3D 모델링의 양쪽 데이터를 모두 활용해 쉬우면서도 고품질의 3D 디자인 솔루션을 공략했다.
3D 프린트용 제품 설계 모델링에서 시작한 엔닷라이트는 2021년 5월 메타버스 솔루션으로 '피봇'하면서 게임·애니메이션으로 전환할 수 있는 툴로 개선했다. 제품 설계 모델링은 0.1mm 오차를 허용하지 않은 대신 색이 중요하지 않다. 반면, 게임 분야 3D 디자인은 색은 중요하지만, 실제 수치가 필요 없다. 박 대표는 "제조와 게임 디자인 분야 모두를 만족하도록 색 보정과 좌표 데이터를 모두 활용하고 있는 게 엔닷캐드의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로블록스에서 부족한 '곡면 모델링' 기능을 보완해 작업한 3D 애셋을 로블록스에 게시할 수 있다. 수치만 입력하면 원클릭으로 의자, 책상 등 물체의 모델링이 완성된다.
SF영화, 3D 프린터에 매료
학창 시절 공상과학(SF) 영화 ‘쥐라기 공원’에 매료된 그는 특수시각효과(VFX)를 공부하기 위해 2002년 아주대 미디어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손목이 아파졌다. 의사가 전공을 바꾸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의 길을 포기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이자 엔닷라이트를 공동 창업한 김선태 최고기술책임자(CTO)를 49기 입사 동기로 만났다.엔닷라이트 법인은 2020년 1월 설립됐지만, 엔진 개발은 2016년부터 시작했다. 당시 박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3D 프린터였다. 건설 조선 등 제조업은 외국산 3D 설계를 사용하고 있던 터라 국산 3D 모델링 솔루션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고가의 엔진을 살 돈이 없어 직접 엔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돌쟁이 아들을 낮잠 재우고 한 땀 한 땀 코딩했다. 그렇게 2018년 3D 프린팅 행사 '메이커 페어'에 처음 모델링 프로토타입을 공개했다.처음 3D 모델링을 만들었을 땐 3D 프린터 교육시장을 염두에 뒀다. 학교 선생님 300명을 확보해 2주마다 소프트웨어를 보내고 피드백을 받았다. 초등학생이 쓸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가볍게 만들었다. 전문가용 3D 엔진은 4기가바이트 정도로 무겁지만, 엔닷캐드 엔진은 100메가바이트가 안 된다.
박 대표는 "교육시장은 워낙 작아 돈 벌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안 했다"며 "다만 지금까지 교육시장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은 '락인' 효과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근 성남시 청소년수련관과 엔닷캐드 공모전을 열기도 했다. 이곳에서 엔닷캐드를 활용해 로블록스 아이템부터 게임까지 만드는 교육을 하고 있다.
메타버스로 '피봇'...전환기 마련
하지만 3D 프린터 시장이 예상만큼 활성화되지 않으면서 투자자를 찾지 못했다."데스밸리(죽음의 계곡)에 몇 번 다녀왔죠. 당초 예상대로였다면 이미 집마다 3D 프린터가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달랐어요. 2020년까지 3D 프린트라고 하면 벤처캐피털(VC) 미팅도 안 잡혔죠."
2021년 봄, 메타버스 콘텐츠 솔루션으로 ‘피봇’하면서 전환기를 맞았다. 3D 프린트용 제품 설계 모델링을 게임·애니메이션으로 전환할 수 있는 툴로 업그레이드했다. 그해 8월 KB인베스트먼트와 캡스톤파트너스로부터 프리 A 단계 투자 유치에도 성공했다.
삼성전자를 거쳐 네이버 클로바 리드로 일한 김선태 CTO도 지난해 엔닷라이트에 합류했다. 삼성전자 49기 동기인 김국헌 서버 리드도 함께 합류해 실시간으로 3D 디자인 협업이 가능한 웹 버전 엔닷캐드 개발을 이끌었다.
전자상거래부터 자동차까지...커지는 3D 디자인
다음 목표는 B2B 시장이다. 박 대표는 “엔닷캐드는 포토샵 정도를 다루는 2D 디자이너 입문자들이 손쉽게 3D 모델링을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라며 “기업 담당자들도 3D 저작환경 구축이 필요 없이 웹에서 협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국내 대기업들도 자체 3D 콘텐츠 저작 툴을 앞다퉈 구축하고 있다. 메타버스 크리에이터 시장에선 3D 콘텐츠가 자산 가치가 있는 '3D 애셋'이기 때문이다.
엔닷라이트는 블로그와 포스트 서비스를 제공하는 네이버 스마트에디터와 웹 기반 3D 디자인 스튜디오를 공동개발하고 있다. KT의 메타버스 플랫폼 '지니버스'에도 엔닷라이트의 3D 디자인 소프트웨어가 공급되고 있다. 이밖에 상품정보나 공간을 3D로 전환하고자 하는 전자상거래, 부동산 및 자동차 인테리어로 기업 고객을 늘리고 있다.
박 대표는 "우리의 궁극적인 사업모델은 회사에 엔닷캐드 엔진을 공급하는 동시에 3D 애셋을 웹서버(API) 형태로 공급하는 B2BC(기업 간 거래+기업와 소비자 간 거래) 모델"이라며 "3D 애셋이 거래되는 마켓플레이스 구축을 통해 크리에이터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진출 성공이 관건
엔닷라이트는 최근 80억 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 유치도 마무리했다. IMM인베스트먼트의 주도로 산업은행, CJ인베스트먼트가 신규 참여했고, 기존 투자자인 네이버 D2SF와 캡스톤파트너스가 후속 투자를 이어갔다.
이번 투자를 주도한 IMM인베스트먼트의 조석영 매니저는 “엔닷캐드는 자체 3D 엔진을 기반으로 쉬운 사용성, 서비스 안정성, 메타버스 플랫폼과의 호환성을 두루 갖춘 제품”이라며 “엔닷라이트는 다양한 산업군으로 빠르게 사업을 확장하고 해외 진출에 성공할 것으로 판단했다”라 투자 배경을 전했다.
엔닷라이트는 연내 미국 법인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엔닷라이트의 3D 모델링 엔진은 유니티, 언리얼 등과 함께 CB 인사이트가 선정한 ‘2022 글로벌 메타버스 시장을 이끄는 주요 3D 엔진’에 선정되며 이름을 알렸다. 엔닷캐드는 CES 2023 소프트웨어 및 모바일앱 부문에서 혁신상을 받았다.
참, 한 가지 더
3D 시장은 모델링·렌더링·모션그래픽·시각효과 기술을 포괄하는 ‘3D 애니메이션’ 시장으로도 불린다. 전산업 분야에 3D 관련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시장을 포함한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그랜뷰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3D 애니메이션 시장은 지난해 204억달러(약 25조2900억원)에서 2030년 510억달러(약 63조2250억원) 규모로 연평균 12.1% 성장할 전망이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30%)는 3D 모델링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이미지를 3차원으로 생성하는 게 모델링이라면, 3D 모형에 질감과 색을 입히는 것은 렌더링, 여기에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은 모션그래픽이다. 또 영화 ‘아바타’처럼 실제 영상에 컴퓨터 그래픽이나 다른 이미지를 합성해 실감 나는 가상의 이미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게 시각효과 기술이다. 특히 시각효과 분야는 메타버스 플랫폼이나 영화에서의 가상효과 수요가 커지면서 2030년까지 연평균 13.8%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일 전망이다.3D 애니메이션이 활용되는 산업 분야별로 보면 미디어·엔터테인먼트가 가장 큰 비중(35%)을 차지한다. 전자상거래의 3D 이미지 수요도 크다. 캐나다 쇼피파이가 판매자들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온라인 쇼핑몰에서 3D 이미지를 사용할 때 구매 전환율은 94% 증가하고, 반품률은 40% 감소했다. 이밖에 제조, 건설, 국방, 의료 등 전 산업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