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눈이 녹으면, 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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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원문]
눈이 녹으면
윤선민
눈이 녹으면 뭐가 되냐고
선생님이 물으셨다다들 물이 된다고 했다
소년은 봄이 된다고 했다
[태헌의 한역]
雪融(설융)雪融爲何物(설융위하물)
師傅忽然云(사부홀연운)
諸生曰化水(제생왈화수)
少年謂作春(소년위작춘)
[주석]
· 雪融(설융) : 눈이 녹다.
· 爲何物(위하물) : 무슨 물건이 되는가?, 무엇이 되는가?
· 師傅(사부) : 사부, 선생님. / 忽然(홀연) : 홀연, 문득. 한역(漢譯)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云(운) : ~라고 말하다. 원문의 “물으셨다”를 시운(詩韻)을 고려하여 한역한 표현이다.
· 諸生(제생) : 여러 학생. 원문의 “다들”을 한역한 표현이다. / 曰(왈) : ~라고 말하다. / 化水(화수) : 물이 되다, 물로 변하다.
· 少年(소년) : 소년. / 謂(위) : ~라고 말하다. / 作春(작춘) : 봄이 되다, 봄을 만들다.
[한역의 직역]
눈이 녹으면눈이 녹으면 무엇이 되지?
선생님이 문득 말씀하셨다
다들 물이 된다고 했지만
소년은 봄이 된다고 했다
[한역 노트]
역자가 임의로 “눈이 녹으면”이라는 제목을 붙인, 시(詩)로 보아도 손색이 없는 이 글은 제법 여러 해 전부터 별다른 저자 표시 없이 인터넷상에서 매우 자주 눈에 띄었다. 그리하여 문무학 시인의 시 <인생의 주소>와 비슷하게 이 글 역시 작자가 있음에도 익명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검색을 시도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글이 윤선민씨의 저서인 ≪웍슬로 다이어리≫(북스코프, 2008)에서 따온 것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글을 어떤 형태로든 이용할 때면 최소한의 예의, 곧 저자 이름이나 책 이름 정도는 밝혀주는 것이 상식에 속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데도 익명 뒤에 숨어 타인의 글을 마치 자신의 글인양 주변에 소개하여 마침내 온라인에 확산되도록 하는 것은,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원저자나 세상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행위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역자는 언제부턴가 SNS에서 만나게 되는, 익명으로 처리된 멋있는 글귀의 주인은 대개 그 글을 올린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런 의심이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겠지만, 뜻하지 않은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는 하나의 궁여지책(窮餘之策)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학생들이 얘기한 물이라는 대답이 틀린 것이 아님에도 우리가 한 소년의 대답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정확하게는 글쓴이가 소년의 대답에 방점을 찍게 된 것은 그 대답의 희소성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대답한 물과 소년이 대답한 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역자가 보기에는 눈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것은 과학적인 ‘현상’이고, 눈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것은 감각적인 ‘변화’로 이해된다. 현상에 주안점을 둔 대답과 변화에 주안점을 둔 대답 사이에 무슨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봄이 된다고 한 그 대답의 의외성과 참신성은 획일화에 익숙해진 우리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역자가 얘기한 현상이 객관적이라면 변화는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상이 현재적이라면 변화는 미래적이라 할 수 있고, 현상이 미시적이라면 변화는 거시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혹시 소년은 선생님이 질문한 의도를 읽어낸 것이 아닐까? 선생님이 질문에 모종의 의도를 실어 화두(話頭)처럼 던진 것이라면, 선생님과 소년의 관계는 석가(釋迦)와 가섭(迦葉)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석가가 모여 있는 대중 앞에서 설법을 하려다 말을 하지 않고 연꽃을 한 송이 들어 보여주자[염화시중(拈花示衆)] 다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였는데, 유독 가섭만이 홀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고 하는[가섭미소(迦葉微笑)] 불교계 일화와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 글만으로는 그 선생님의 의도를 읽어낼 수는 없지만 말이다.
역자는 이 글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음미하면서 까마득한 옛날에 읽었던 어느 잡지에 실린 짤막한 이야기 하나를 떠올려 보았다. 부천시의 어느 공사 현장에 제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담배를 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세 명의 일꾼이 있었는데, 여기를 지나가던 어느 시인이 이들에게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냐는 똑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A라는 일꾼은 “보면 모르겠소? 막노동하고 있지 않소?”라 하고, B라는 일꾼은 “처자식을 먹여 살리자면 이 일이라도 해야지요.”라 하였으며, C라는 일꾼은 “우리는 지금 놀이터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나중에 애들이 여기서 즐겁게 뛰어놀 걸 생각하며 만들고 있는 중이지요.”라고 하였다는 그 이야기..... 잘은 몰라도 그 세 일꾼은 일당(日當)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돈을 받으며 같은 공간 안에서 거의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일에 대한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까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 속의 소년이 눈이 녹으면 봄이 된다고 한 것은 그 소년이 다른 학생들보다 특별히 머리가 더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소년의 관심과 눈길이 보통 학생들과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타의 학생들과는 다른 답안을 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르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 할지라도 때로 소년처럼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을 획일화된 틀 속이 아니라 자유로운 감성의 들녘 위에서 노닐게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어느 산골짝에서 노루귀를 촉촉하게 적시며 눈이 녹을 이즈음에, 도회지에도 시나브로 봄이 오고 있다. 봄바람이 약해도 벌써 봄임을 알아채는 사람이 있듯, 봄이 무르익어서야 겨우 봄임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봄의 길이와 깊이 또한 저마다 다르게 다가올 터이니, 결국 봄의 크기는 각자가 정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인생 청춘의 시기를 우리 스스로가 정할 수 있는 것처럼……
역자는 4행으로 이루어진 원문을 오언 4구의 고시로 한역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의미인 “~이 되다”와 “~이라 하다”의 역어(譯語)를 의도적으로 달리하여 약간의 변화를 도모하였다. 한역시를 중점적으로 감상하는 독자에게는 지루하지 않은 감상 시간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으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云(운)’과 ‘春(춘)’이 된다.
2023. 2. 14.<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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