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정쟁에 발목 잡힌 'K칩스법'…이러다 베트남에도 역전당할라

파운드리 업체들 잇단 베트남행
巨野, 지원 대신 '쪽박'만 차서야

강경주 중기과학부 기자
“얼마전까지만 해도 대만 TSMC를 주목하는 이가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TSMC에 관해 얘기합니다. 순식간에 바뀌는 반도체 업황을 고려할 때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관련 업체가 줄줄이 베트남으로 향하는 것을 무심히 봐선 안 됩니다.”

팹리스 분야 전문가인 한 유명 공대 교수는 대뜸 최근 베트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말을 내뱉었다. 값싼 노동력 공급지로만 여겨졌던 베트남 경제가 확 달라졌다는 것이다.그의 말마따나 국내 주요 팹리스 관련 업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문 인력을 구하러 베트남으로 발을 옮기고 있다. 삼성 파운드리 협력업체인 에이디테크놀로지는 총 500명의 설계 엔지니어 중 200명이 베트남 자회사의 현지 엔지니어다. 코아시아도 베트남과 대만 디자인센터에 총 400명의 엔지니어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12월 인공지능(AI), 5세대(5G) 이동통신 등을 다룰 연구인력 3000명 규모의 호찌민 연구개발(R&D)센터를 완공하면서 ‘K반도체’ 업체의 베트남 이주는 더욱 심화할 전망이다.

한국 기업만 베트남에 주목하는 게 아니다. 미국 반도체 설계기업 시놉시스는 호찌민에 반도체칩설계센터를 설립했다. 400명 규모인 베트남 직원 수도 700~800명으로 늘리기로 했다. 애플, 인텔, 폭스콘도 베트남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업계가 베트남에 주목하는 것은 값싸고 우수한 반도체 인력을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르네사스 도시바 등 일본 업체들이 육성한 우수한 인력풀이 있고, 베트남 정부가 현지 진출 기업에 수출·입 관세 등 각종 세제 혜택을 적극적으로 제공하면서 조성된 환경이다.반면 한국에선 반도체 전문 인력을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다. 올해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신입생 모집에서도 정원이 넘는 추가합격자를 뽑아야 했을 정도로 국내 우수 인재에게 반도체 연구는 최우선 선택지가 아니다.

설상가상 반도체산업을 적극 밀어줘도 시원찮을 정치권은 ‘쪽박’을 깨는 데만 열심이다. 반도체 설비 투자 세액 공제율을 높이는 조세특례제한법(조특법) 정부 개정안은 거야(巨野)의 몽니에 발목이 잡혀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베트남의 설계 인력 확충은 대만에 이어 언젠가 베트남마저 한국 반도체산업을 추월하는 어두운 미래를 경고한 것일 수 있다. 반도체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을 팔짱만 끼고 바라만 봐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