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가 사람에게 말을 거는 세상…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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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비엔날레를 빛낸‘꿈의 우유’(202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숨죽인 채로’(2022년 휘트니 비엔날레), ‘어둡지만 나는 노래한다’(2021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세계적 설치미술가 양혜규 인터뷰
라탄과 방울로 만든 쌍둥이 조각
콘센트로 생명 에너지 형상화
인간-비인간의 관계를 되물어
"韓, 미술시장 관심 커졌지만
작품 이해도는 아직 못미쳐
아시아 미술 허브 되려면
작가 이름보다 작품 의미 중시해야"
‘미술계 축제’로 불리는 비엔날레의 큰 주제는 대개 이런 식이다. 그해 전시 주제를 함축한 제목이 공식처럼 따라붙는다. 기획자들에게 감각적이고 세련된 제목을 짓는 것이 최대 과제다. 싱가포르에서 오는 3월 19일까지 열리는 ‘제7회 싱가포르 비엔날레’는 조금 다르다. ‘나타샤’라는 사람 이름이 붙었다. 행사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인간과 비(非)인간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해보자’는 비엔날레의 주제를 신선하게 나타냈다.싱가포르아트뮤지엄(SAM) 1층에 전시돼 있는 세계적 설치미술가 양혜규(51)의 ‘하이브리드 중간 유형 무성한 전기 이인조’는 이런 의도를 단번에 관통한다. 양 작가는 이 작품으로 싱가포르 비엔날레와 베네세재단이 공동 주최한 ‘베네세 상’을 받았다. 라탄과 방울로 만들어진 쌍둥이 조형물 앞에 서면 자연스레 질문이 떠오른다. 사물과 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이 작품과 싱가포르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나타샤’를 잇는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독일에 살고 있는 양혜규 작가에게 화상 대담을 요청했다. 평소 미술계에서 인터뷰하기 어렵고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그답게 미술시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기술 진화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사물·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대
▷이번 작품과 ‘나타샤’가 맞닿는 지점은.“작품을 보면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불분명하다. 라탄과 방울 등 공예 재료로 온통 뒤덮여 있는 조형물인데, 마치 사람처럼 서 있다. 눈여겨볼 건 표면에 음각·양각으로 새겨진 전기 콘센트다. 콘센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전류 에너지를 받아내는 일종의 정거장이자 무생물에 에너지를 부여하는 장치다. ‘하이브리드 중간 유형’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물(thing)’과 ‘생명체(creature)’ 그 중간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생물에도 이름을 짓는 인간의 행태에 주목한 비엔날레의 기획 의도와 연결된다.”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를 허문다는 뜻인가.“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 않나. 냉장고가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자동차 대신 모빌리티라고 부르는 시대다. 사물과 인간 사이의 ‘연결성’을 말하고 싶었다. 조각 역시 무생물이지만, 인간이라는 생물과 오랜 세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동시에 이 작품은 ‘자성(自省)’의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껏 자연을 대상화하면서 환경을 파괴해온 인류에 대한 반성으로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돌아보자’는 분위기가 문화계 전반에 퍼지고 있다. 작가인 나도 예외가 아니다.”
▷두 개의 조형물이 쌍둥이처럼 있는 게 독특한데.
“한 점으로 이뤄진 ‘단일조각’보다는 여러 점으로 이뤄진 ‘앙상블’ 작업을 선호하는 편이다. 단일조각이 절대적이고 완결된 권위를 갖는다면, 앙상블은 파편적이고 개별성이 두드러진다. ‘하이브리드 중간 유형’도 마찬가지다. 하나는 한국에서, 다른 하나는 필리핀에서 온 ‘이란성 쌍둥이’다. 각기 다른 곳에서 만들어 한 점의 작품으로 완성된다는 것이 ‘동남아의 게이트웨이(관문)’라는 싱가포르의 장소성과 연결된다.”
“싱가포르는 나를 반성하게 만든 곳”
양 작가와 싱가포르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9년 싱가포르국립미술관(NGS)은 ‘아웃바운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옛 시청 건물 2층 로비 공간을 양 작가에게 맡겼다. 싱가포르 독립 선언이 이뤄진 파당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그렇게 탄생한 ‘드론 연설을 위한 포럼 싱가포르 시뮬레이션’은 기하학적 구조의 대리석과 흑백 이미지, 청동상 등에 싱가포르의 과거와 현재를 담았다.▷작품의 제목이 특이한데, 어떤 의미인가.
“영국 식민통치 이후 강력한 국가주의를 앞세운 싱가포르의 역사와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근처에 가면 싱가포르 공대에서 개발한 로봇이 마치 연설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인공지능(AI)이 장착된 로봇은 장소의 의미를 대독한다. 예를 들어 왜 자신의 영어에서 싱가포르 억양이 드러나지 않는지 자문하는 식이다. 아시아 국가의 근대성이 지역성을 무시한 채 형성됐다는 점을 나타냈다.”
▷작가로서 싱가포르는 어떤 나라인가.
“2010년대 초반 싱가포르의 판화 전문 기관에서 레지던시를 한 적이 있다. 그때 ‘한·중·일이 아시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건 정말 오만했구나’라는 걸 느꼈다. 싱가포르는 원주민부터 중화권, 힌두, 무슬림 등 다양한 문화권의 이민 인구가 모여 사는 곳이다. 남방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도도 굉장히 높다. 물론 싱가포르도 국가가 앞장서서 미술시장을 키우기 위해 아트페어를 만드는 등 미술계의 생명력을 저해하는 인위적 발전과 기형적 발상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러 문화에 대한 이해도와 포용력이 높다는 건 확실한 강점이다.”
“작가 명성 좇기보다 작품 이해 선행돼야”
▷한국은 어떤가.“한국은 아직 주변 국가에 대한 지식과 관심은 물론, 이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정서가 갖춰지지 않은 듯하다. 아시아 문화의 ‘허브’가 되려면 이러한 공감대가 필수다.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이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음달 4일 브라질 상파울루 피나코테카에서 열리는 개인전 ‘의사(擬似)-구어체(Quasi-Colloquial)’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작가들의 활동이 의식 있는 대중을 길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작가로서 개인적인 목표가 있나.“목표나 도전을 얘기할 때가 아닌 것 같다. 내실을 기하고 신뢰받는 작가로 꾸준하게 활동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다만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높아지는데,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아직 뒷받침되지는 못하는 점이 아쉽다. 미술이 시장 주도형으로 바뀌는 게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래서 미술시장에 대한 과도한 집중이 작가로서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미술의 가치는 작가의 명성이나 작품값이 아니라 미술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싱가포르=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