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삼성 아니면 미래"…ETF 출시 포기합니다 [돈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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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 운용사들, ETF 출시계획 철회·재검토"안 하자니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 같고, 하자니 이미 시장을 꽉 잡고 있는 대형사들과 겨뤄서 이길 재간이 없어요.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인 것 같아요."
"안 하면 뒤처질까 걱정, 해도 손해볼까 우려"
올해 상장지수펀드(ETF) 시장 진출을 저울질하고 있는 어느 운용사 대표가 최근 한 말이다. ETF는 운용자산의 투명성, 판매보수와 수수료 면제 등 일반 펀드 대비 장점이 많아 투자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하지만 이미 운용사 23곳이 밀도 높게 경쟁하는 시장인 만큼, 성장성만 보고 진출했다간 실속 없이 비용만 들일 수 있다. '수익성과 성장성 중 어느 쪽에 서야 할지'는 사실상 후발주자 모두의 고민이기도 하다. 22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최근 일부 자산운용사들은 올해 ETF 신규 진출 계획을 재검토하거나 철회하고 있다. 당초 작년 말까지 당국 등을 통해 ETF 사업 진출 계획을 알린 운용사는 총 4곳이었다. 하지만 올 2월 현재 이 중 절반은 시장 진출 계획을 거뒀다.
연내 ETF 출시가 유력한 곳은 삼성액티브자산운용과 IBK자산운용이다. 삼성액티브자산운용은 일정이 기존보다 지연되고는 있지만 상반기 중 첫 상장에 나설 전망이다. IBK자산운용은 하반기 출시를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진 곳들도 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올해 ETF 사업 개시를 염두에 두고 작년부터 논의를 이어왔지만, 결정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다. 후발주자로서의 부담감 때문이다. 익명을 요청한 또 다른 운용사는 그룹의 반대로 출시 계획을 접었다. 이 운용사 관계자는 "실무진에서 ETF 진출의 필요성을 느끼고 브랜드와 상품 소개서까지 만들어가며 준비를 끝냈으나, 시장 내 점유율 확보에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는 그룹을 설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운용사들이 시장에 나서길 주저하는 이유는 같았다.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 두 기업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미있는 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일 종가 기준 국내 ETF 시장의 순자산총액이 90조원 수준인데, 이 중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점유율은 각각 42.14%, 37.68%에 달한다. ETF 사업을 위한 시스템을 갖추는 데 들인 비용을 감안하면, 저보수로는 장기적으로도 손해를 보는 장사라는 게 중소형사들 주장이다. 물론 보수 수준을 조금 높이려면 시장에 없던 상품을 내놓으면 되는데, 이마저도 이른바 '스타 ETF'로 키우기는 어렵다. 활발한 마케팅으로 브랜드 로열티를 자랑하는 대형 운용사들과 비교해 거래대금과 거래량이 부진할 수밖에 없는데, 시장에서 현상유지하기도 버겁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ETF 사업을 한다며 '흉내만 내는' 기업들도 생겼다. 작년 ETF 시장에 진출한 모 운용사는 코스피200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 ETF로 내놓았다. 중형운용사가 첫 상품으로 선뵌 게 운용사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코스피200 추종 ETF여서, 당시 시장의 의문을 샀다. 이면은 이랬다. 그룹 차원에서 'ETF를 내라'는 주문이 있었지만, 실무진들은 양강 구도가 잡힌 상태에서 승산이 없을 것이라며 반발했다. 결국 양측은 누구나 운용 중인 지수 추종 상품 한 개만 시장에 내놓는 것으로 합의한 것이다.중형 운용사 한 임원은 "우리가 고심해서 국내나 세계 최초 상품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대형사들이 뒤늦게 낸 뒤 마케팅에 힘쓰면 우리가 달았던 '최초 타이틀'도 사실상 무색해진다"고 토로했다.
한편 당국은 양대 운용사의 시장 독과점 문제에 공감하면서도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운용사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하는 문제라고 봤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ETF 시장 초기 삼성의 독점 형태에서 최근 삼성과 미래의 과점 형태로 바뀐 것만 해도 큰 변화"라며 "운용사들이 타사와 구별될 수 있는 특화 상품들을 내놓고 인력·조직적 대응도 빠르게 한다면 지배력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