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원고 쓴 책상, 손때 묻은 안경…시대의 스승이 남긴 흔적

국립중앙도서관, 이어령 1주기 추모 특별전 '이어령의 서(序)' 내일 개막
'동갑' 미키마우스 좋아하기도…대표 저서 초판본 포함 여러 유품 선보여
책상 위에는 탁상용 달력, 메모지, 필기구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진 게 없다.

벽면에 새겨진 한 문장.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한 발 한 발 가보는 것, 그 재미로 살았어요.

"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세상과 이별하기 한 달 전인 지난해 1월까지 이 책상 위에서 글을 썼다. 몸이 쇠약해지며 컴퓨터를 쓰는 게 힘들어지자 다시 연필과 펜을 잡은 것이다.

마지막 원고인 '눈물 한 방울'에 실린 글을 비롯해 총 147편이 이 책상 위에서 완성됐다.

국립중앙도서관이 24일 공개한 이 전 장관 1주기 추모 특별전시 '이어령의 서(序)'는 문학 평론가, 작가, 언론인, 문화 기획자, 교수 등 경계 없는 삶을 살아온 고인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책이나 논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서문'(序文)에서 따온 전시 제목 '서'는 시작을 뜻한다.

갈윤주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가운데 '끝이 없어, 이어지고 펼쳐질 뿐'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전시에서는 영면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전시 공간 가운데 '창조의 서재'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최고 명장면인 '굴렁쇠'를 모티브로 해 꾸며졌다.

큰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소년이 굴렀던 굴렁쇠는 당시 전 세계에 큰 인상을 남겼다.

당시 총괄 기획을 맡아 문화 기획자로서의 면모를 뽐냈 이가 이 전 장관이다.

굴렁쇠처럼 둥근 원 3개로 구획된 전시 공간에는 고인이 평소 쓰던 물건이 놓였다.

초대 문화부 장관 시절 사용한 명패부터 이화여대 재직 시절 들고 다닌 가방, '이화10년 발전후원회' 회원증 카드, 안경 등까지 모두 이 전 장관이 손때가 묻은 물건이다.

생전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듯 각기 다른 소속과 직책의 명함도 눈에 띈다.

시대의 탁월한 지성이자 스승으로 불리던 그의 평소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물건들도 많다.

이 전 장관은 손이 닿는 곳에 필기구를 뒀다고 한다.

집안 어디에나 '글 쓸 준비'가 돼 있던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2층 방과 거실 등에 있던 필통 5개를 볼 수 있다.
이동식저장장치(USB)에는 '22분 52초 출연' 등이 적혀 있어 평소 꼼꼼했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날카로운 시각으로 시대 정신을 논하던 고인과 어울리지 않을 듯한 미키마우스 캐릭터 물품도 있다.

도서관 관계자는 "선생님은 당신과 출생연도가 같은 미키마우스, 미니마우스를 좋아하셨다고 한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굴렁쇠를 채운 건 고인이 마지막으로 쓴 책상과 의자, 각종 소품이다.

부인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더는 컴퓨터를 쓸 수 없어 책상을 가져다 놓고 '눈물 한 방울'을 쓰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당시 책상에 있던 메모지도 그대로"라며 한참 동안 책상을 바라봤다.

어린이 책 66권을 포함해 단독 저서 185권을 빼곡히 채운 공간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이곳에서는 그의 대표작인 '저항의 문학'(1959),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3),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 '공간의 기호학'(2000), '너 어디에서 왔니'(2020) 등 5권의 초판본도 볼 수 있다.
갈 사서는 "20대부터 따지면 한 해 평균 2.7권의 책을 쓰신 셈인데, 한 사람이 이 정도의 책을 썼다는 게 대단하다"며 이 전 장관이 남긴 말과 글, 책의 '힘'을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공식 개막을 하루 앞두고 이날 열린 개막식에서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어느 공간, 어느 분야에서도 독보적이었고 탁월한 면모를 보였던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이 전 장관을 추모했다.

박 장관은 "고인의 삶은 상상력의 서사시였다"고 언급하며 "오늘날 K-컬처, K-아트 등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영역에서 눈부신 성취 기반을 만들어주셨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전시는 25일부터 4월 23일까지 열린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