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 사절단, 지식·기술 배우려 하지 않고 외면…청나라 다녀온 북학파는 개혁과 실학 주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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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오랑캐 나라로 간 여행자들(下)외국에 나가도록 승인받은 사람들은 국가가 파견한 관리와 상인, 수행원이었다.
첫째는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이었다. 300~5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이 12차에 걸쳐 파견됐는데, 대마도에서 도쿄까지 왕복하는 데 거의 1년이나 걸렸다. 그들이 견문하고 체험한 18세기 일본은 자체 발전정책과 난학(네덜란드학)의 수입을 통해 새로운 지식, 기술 등을 보급받아 국력이 팽창했다. 김세렴·신유한·조엄 등 몇몇 인물이 일본 사회를 분야별로 분석하고 기록하며 난학의 우수성도 언급했다. 이들은 고구마를 들여오고, 수차 기술 등도 전달했지만 조선 사회 변화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개혁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통신사를 파견한 목적 자체가 학습과 수용의 기회가 아니라 시혜와 과시, 일본의 군사적인 도발을 막으려는 회유였다. 따라서 그들의 자세는 자랑과 오만, 일본에 대한 멸시가 많았고, 보고서를 제출해도 정부는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반면 청나라에 공식 파견된 연행사는 달랐다. ‘북학파’라는 세력으로, 조선 후기 사회 개혁과 실학의 초기 주체로 변신했다. 이들은 일단 규모가 컸다. 1회에 30명의 정식 인원과 수행원을 포함해 200~300명 정도가 파견됐다. 1637년부터 1894년까지 250여 년간 507회였으니 총인원을 고려하면 그들의 영향력은 엄청났을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박작성·구련성 등을 보는 홍대용·박지원·박제가를 비롯한 젊은 선비들의 눈길과 가슴을 떠올린다. 불안한 조선의 현실을 떨치지 못한 채 사명의식과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봉금지대를 통과해 경계선인 봉황성(鳳凰城)에 닿았다. 이어 요양·심양을 경유하며 요하를 건너 홍대용처럼 의무려산을 넘어 요서지방에 들어서 고조선의 유적을 보며 베이징까지 총 3100리를 갔다. 왕복 5개월여 동안 그들이 본 자연과 사람 그리고 지식과 기술, 문화는 어땠을까.건륭제가 재위하던 18세기 중반 청나라는 160만㎢라는 가장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고, 상업과 무역이 발달해 부유했다. 서양 기술과 과학지식, 천주교를 수용해 문화도 발전했다. 연행사들은 베이징에서 공식적으로 60일 동안 체류가 가능해 공적 업무 외에도 사적인 일들을 할 수 있었다. 홍대용은 사적인 시간에는 33일 동안이나 중국의 각지에서 온 학자들과 교류했다. 지금도 한국인들이 방문하는 고서점가인 유리창을 비롯해 천주교와 성당 등을 답사했다. 전쟁에 굴복했으면서도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비웃었던 오랑캐들이 성취한 놀라운 현실을 목도하고 체험한 연행사들에게 조선이 간직한 모화사상은 뿌리까지 뒤흔들릴 수밖에 없었다.더구나 후반부 구간을 빼놓고는 찾은 지역이 고구려 영토였던 만큼 고구려 역사를 인식했고, 사실들을 규명했다. 지금도 봉황성(고구려 오골성)을 비롯한 압록강 하구와 요동지방에는 많은 고구려의 성과 무덤, 마을 유적이 있다. 요서 지역에도 원(고)조선과 관련된 유적과 이야기가 많다. 이런 조상들의 역사는 그들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을까? 연암의 제자인 안정복 등의 역사 서술에 어떻게 작동했을까?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안시성 공방전을 벌일 때 양만춘이 쏜 화살에 당태종이 눈을 맞은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삼국사기>가 담지 못한 안시성의 성주였던 ‘양만춘’의 이름을 찾아주었다.
연행사를 따라간 이들은 저술, 전파, 실천 등을 주도하면서 현실적인 세계관과 백성의 생활 향상 등을 목표로 삼은 ‘이용후생’을 정책 목표로 표방했다. 이를 위해 청나라와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경제, 정책, 기술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또 자의식의 부활과 역사 해석의 자주적인 관점 및 연구방법론을 제시했다. 이들은 지역적 의미와 실용성이라는 논리적 배경까지 갖춘 ‘북학’을 자처하면서 ‘실학’의 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