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病後戱作(병후희작), 徐居正(서거정)

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원시]
病後戱作(병후희작)徐居正(서거정)

醫士勸吾休飮酒(의사권오휴음주)
儒家欺我酷耽詩(유가기아혹탐시)
今朝破戒翻成笑(금조파계번성소)
醉酒顚詩自不知(취주전시자부지)

[주석]
· 病後(병후): 병을 앓은 후에, 앓고 난 후에. / 戱作(희작) : 재미삼아 짓다, 장난삼아 짓다.
· 徐居正(서거정) : 조선(朝鮮)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강중(剛中)이고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문집에 ≪사가정집(四佳亭集)≫, ≪동인시화(東人詩話)≫ 등이 있다. 여섯 왕을 섬기며 45년간 대제학(大提學), 대찬성(大贊成) 등의 벼슬을 지냈다.
· 醫士(의사) : 의원(醫員), 의사(醫師). / 勸吾(권오) : 나에게 ~을 권하다. / 休飮酒(휴음주) : 술을 마시지 말라. ‘休’는 ‘勿(물)’의 뜻이다.
· 儒家(유가) : 유자(儒者), 유생(儒生), 유학자(儒學者). / 欺(기) : 업신여기다, 깔보다. ‘欺’의 목적어[賓語]는 아래 구절 전체이다. / 我酷耽詩(아혹탐시) : 내가 몹시도 시를 즐기다.
· 今朝(금조) : 오늘 아침. / 破戒(파계) : 파계하다, 계율(戒律)을 깨다. / 翻(번) : 도리어, 문득. / 成笑(성소) : 웃음 짓다.
· 醉酒(취주) : 술에 취하다. / 顚詩(전시) : 시에 미치다. / 自不知(자부지) : 스스로(가) 알지 못하다.[태헌의 번역]
앓고 난 후에 재미삼아 짓다

의원은 나에게 술을 마시지 말기를 권하고
유자들은 내가 시 몹시 즐기는 걸 깔보는데
오늘 아침에 파계하고 문득 웃음을 짓나니
나도 모르는 새 술에 취하고 시에 미쳤구나

[번역노트]
이 시는 희시(戱詩)이다. 희시는 다소 유머러스한 내용을 담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특별한 유머도 없이 시인 스스로가 타인의 비방이나 문제 제기로부터 비켜나기 위하여 제목에 ‘戱’를 쓰는 경우 역시 없지 않다. 이 시를 전자의 예로 보든 후자의 예로 보든 우리는 시인의 의도를 존중하여 시를 너무 심각하게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시인이 이 시를 통해 던진 화두(話頭) 두 가지는 술과 시이다. 의원이 시인에게 금주(禁酒)를 권했다는 데서 병이 술로 인하여 생겨났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도 병이 낫자마자 곧바로 파계(破戒)하여 다시 술에 취했다는 것은 술에 그만큼 인이 박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눈여겨볼 것은 대부분의 옛날 시인들에게 있어 술은 혼자 하는 무엇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시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술과 시는 풍류를 즐기려고 하였던 옛날 선비들에게는 피해가기 어려운 치명적인 유혹이 되었을 것이다. 술을 좋아하여 시인이 된 것인지, 시인이라서 술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시를 즐기자면 술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술을 마시면 흥이 일어 시를 짓게 되었을 테니, 시와 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시인이 시를 몹시도 즐기는 것을 당시 유자(儒者)들이 깔본[업신여긴]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추구하였던 유자, 곧 도학자(道學者)들이 문학(文學)의 영역인 사장(詞章:시가와 문장)을 다소 경시하거나 경계하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학자들이 추구하였던 도는 일상적인 언행에까지 영향을 끼쳐, 자신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 역시 타인의 교과서가 될 수 있기를 희원(希願)하였다. 그리하여 도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문학을 멀리하였음은 물론, 문학과 짝이 되기 십상인 술까지 상당한 정도로 경계하여, 마시기는 하였지만 취하여 추태를 부리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일은 극도로 경계하였다고 할 수 있다.역자의 경험으로 보건대 술이 취해 알딸딸할 때는 논리적인 글쓰기는 쉽지 않아도 감성이 요구되는 시나 수필 등을 쓰거나 메모하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술은 논리가 생명이 되는 철학보다는 감성이 밑바탕이 되는 문학과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예전부터 시인묵객들이 술을 혹애(酷愛)하였던 것도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현대 문단을 빛냈던 변영로(卞榮魯) 선생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과 양주동(梁柱東) 선생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 및 조지훈(趙芝薰) 선생의 술에 대한 해학 등이 시인묵객과 술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술과 시와 더불어 병을 얘기한 시인의 이 시를 감상하고 있자니 마찬가지로 그 세 가지를 주된 심상으로 삼은 역자의 어쭙잖은 시 하나가 떠오른다.

藥袋(약대) 약봉지

案頭詩未積(안두시미적) 책상머리에 시 아직 쌓이지 않고
藥袋疊書間(약대첩서간) 약봉지만 책 사이에 쌓이는 것은
句拙心催酒(구졸심최주) 시구 졸렬하여 마음이 술을 재촉하고
飮多身得患(음다신득환) 마신 것이 많아 몸이 병을 얻은 때문.

역자는 이 시를 서거정 선생의 ‘병후희작’을 만나기 전에 지었더랬다. 그 시기는 역자가 근무하였던 연구소 일과가 끝나기만 하면 한동안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던 때였는데, 시가 잘 되지 않으면 버릇처럼 술을 마신 것이 마침내 화근이 되어 위장약을 장기간 복용하고 있었던 때이기도 하였다. 시가 안 된다는 것을 시로 읊은 것이 하나의 시가 된 것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을 듯하다. 김시탁 시인의 <가을밤>을 곁들여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무엇이나 그렇겠지만 특히 술은 그 ‘적당’이라는 선을 넘으면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죽하면 술은 병기(兵器)와 같다는 뜻의 ‘주유병(酒猶兵)’이라는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이러한 술의 폐해를 염두에 두고 스스로가 술을 경계한 관중(管仲)의 재미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대신(大臣)들을 위하여 술을 마련하고는 한낮에 모이기로 기약하였는데, 관중이 뒤늦게 도착하였다. 환공이 술잔을 들어 그에게 마시게 하였으나 관중은 반만 마시고 나머지를 버렸다. 환공이 말하기를, “기약하고도 뒤늦게 도착하고, 술을 마시다가 버리는 것이 예에 합당하겠소이까?”라고 하자 관중이 대답하기를, “제가 듣기로 술이 들어가면 혀가 나오고, 혀가 나오면 말에 실수가 있게 되며, 말에 실수가 있으면 그 몸이 버려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몸을 버리느니 술을 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졌습니다.”라고 하였다. 환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중부(仲父)께서는 일어나 자리로 가시지요!”라고 하였다. - 유향(劉向), ≪설원(說苑)≫

오늘 소개한 서거정 선생의 시는 칠언절구이며 압운자는 ‘詩(시)’와 ‘知(지)’이다.

2023. 2. 28.<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