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선 넘는 美 반도체법, 한국 기업을 국유화할 속셈인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 재무 상태와 사업계획 등을 보고하고 초과이익을 공유하도록 한 반도체지원법(CHIPS Act) 보조금 지급 기준이 논란을 빚고 있다. 민간 기업, 그것도 외국 기업의 경영에 대놓고 개입하는 ‘독소조항’을 주렁주렁 달아놨기 때문이다. 자국에 투자하려는 동맹국 기업을 이렇게까지 통제하겠다는 발상이 놀라울 따름이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반도체지원법에 따라 1억5000만달러(약 2000억원) 이상 지원금을 받는 기업이 지켜야 할 이행 요건을 발표했다. 상무부는 우선 전망치를 웃도는 초과이익을 미국 정부와 나누고 자사주 매입·배당도 제한하기로 했다. 전망치를 크게(significantly) 초과할 경우에만 해당한다고 했는데, 기준이 모호하다. 또 보조금을 받으려면 재무 상태와 실적 전망치, 영업 기밀인 생산장비 및 원료명 등을 내야 하는 것은 물론 군사용 반도체 제공 협력, 보육 서비스 제공, 인력개발, 지역사회 공헌 등도 필수다. 보조금 수혜 기업이 중국 등에 10년간 투자하지 못하도록 하는 원칙도 재확인했다. 사실상 경영 활동 전반에 간섭하겠다는 것으로 이 정도면 신설되는 외국 반도체 기업을 국영화하겠다는 의도와 뭐가 다른지 묻고 싶다. 미국이 원하는 조건을 모두 맞추려면 배보다 배꼽이 클 지경이다.이처럼 선을 넘은 미국의 태도는 동맹국 간 신뢰와 연대감에 상처만 줄 가능성이 크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바이든 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이어 반도체지원법으로 ‘실적’을 쌓으려 한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미국과의 굳건한 경제안보 동맹을 위해 중국의 견제와 국내 산업 공동화 우려에도 불구하고 어느 나라보다 앞장서 대규모 대미 투자 계획을 밝힌 한국으로선 ‘윈윈’이 아닌 일방적인 희생 강요가 당혹스럽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의 피터 베닝크 최고경영자(CEO)도 “(중국이) 장비를 구할 수 없다면 직접 개발할 것”이라며 ‘10년간 중국 내 생산설비 확장 금지 조건’의 실효성에 의문을 나타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생존을 위한 셈법도 날로 복잡해지는 양상이다. 미국의 조치가 부당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미국과 긴밀히 협의해야 하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정부는 한국산 전기차 차별 논란을 부른 IRA에 이은 반도체지원법의 문제점을 미국 측에 적극 알리는 등 총력전을 펴야 한다. 정치권도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반도체산업을 살리기 위해 세액공제 확대, 수도권 규제 해제 등을 통해 신속하고 파격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