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부장 너는 내가 반드시"…헌책에 남겨진 붉은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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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서의 책이 머무는 집
서울 은평구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서울 녹번동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 들어선 당신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을 만날 기회를 잡을지도 모릅니다. 거쳐간 사람, 지나온 세월에 따라 책에는 제각기 다른 흔적이 남으니까요. 이곳은 문학과 철학, 예술·인문 책을 취급하는 헌책방입니다.

문을 열면 양옆에 책이 수백 권 쌓여 있는 나무계단이 등장합니다. 고개를 들면 천장에는 책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굴에 빨려들어가는 앨리스가 된 기분이죠.
2층에 있는 이 헌책방의 면적은 100㎡ 남짓. 헌책을 수선해주는 제본공방과 반씩 나눠 쓰고 있으니 50㎡ 공간에 헌책 약 5000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에요. 윤성근 대표의 머릿속에 수만 권의 책이 더 들어있으니까요. 그 역시 어린 시절 헌책방 단골이었던 다독가죠. 윤 대표는 “인터넷으로 책 사는 시대에 헌책방까지 찾아오는 분들은 독서 내공이 보통이 아닌 독자”라며 “이들에게 책을 추천해주기 위해 헌책방에 있는 모든 책을 읽어보는 건 물론 1년에 신간을 수백 권씩 사서 읽는다”고 해요.
예컨대 이반 일리치의 급진적 교육론을 담은 <학교 없는 사회>는 ‘헌책방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죠. 책이 절판되고 출판사마저 사라져 정가의 몇 배를 주더라도 헌책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최근 새 출판사에서 이 책을 다시 내요. 이때 윤 대표의 특기가 발휘됩니다. “절판된 책은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가 번역하고 깊이 있는 해설을 붙였기 때문에 여전히 소장 가치가 있어요.” 윤 대표는 별도 창고에 헌책을 2만~3만 권 쌓아두고 계절마다, 이슈 따라 책을 수시로 재배치합니다.
이곳은 은평구 사는 예술인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합니다. 싱어송라이터 김목인 등이 이곳에서 공연을 하고, 금정연 작가도 단골이라고 하네요.
그가 헌책방을 운영하며 지금껏 쓴 책만 열세 권. 최근 그가 출간한 <헌책 낙서 수집광>에는 헌책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으로 만들어주는 기묘한 낙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김OO 부장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는 빨간 글씨가 적혀 있는 <타인최면술>,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적힌 어느 엄마의 일기…. 대부분의 헌책은 가벼운 손때만 묻었을 뿐이니 운이 좋아야 이런 ‘보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책방 이름에서 짐작 가능하듯, 윤 대표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예요. 책방에는 1901년판 희귀본 등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관련 윤 대표의 소장품을 모아놓은 코너도 마련돼 있답니다.
그래도 ‘헌책방 초심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을 알려달라고 졸라봤어요. 윤 대표는 자서전이나 평전을 권했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그 인물이 쓴 다른 책, 혹은 그가 겪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책으로 독서가 막 뻗어나가게 되거든요. 진짜 토끼굴에 빠져드는 거죠.(웃음)”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